
“채무조정기구가 채무자의 재기와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채권 회수 실적에만 매몰되면 채무자들은 재기 의지를 잃게 된다.”
박선종 롤링주빌리 이사장은 몇 번이고 배드뱅크의 최우선 지향점이 채무자들의 경제적 재기임을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건 배드뱅크 설치는 이전 정부에서도 꾸준히 반복돼 온 레퍼토리다. 이제는 설치 그 자체보다 ‘어떻게’가 중요한 시점이다. 박 이사장은 새 정부의 배드뱅크가 단순 부실 채권 처리 기구를 넘어 경제적 회복을 위한 사회안전망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이사장이 몸담고 있는 롤링주빌리는 2015년 이 대통령의 성남시장 재임 당시 장기 연체자의 채무 탕감을 목표로 출범한 시민단체로 지금까지 약 5만명의 부실채권 8100억원(원리금 기준)을 소각해 왔다. 그간 빚으로 고통받는 경제적 약자들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수행하던 롤링주빌리의 운영 모델은 최근 배드뱅크 설치 논의와 맞물리며 주목받고 있다. 이에 12일 박 이사장을 만나 새 정부의 배드뱅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물었다.
李 정부 배드뱅크 구상 “적극적 정책시도”…도덕적 해이 논란은 “오해”
박 이사장은 이 대통령이 내놓은 배드뱅크 구상에 대해 “코로나19 및 12·3 계엄 사태로 심화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정책 시도”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특히 캠코 산하 배드뱅크 설치와 비영리법인 참여 허용은 공공과 민간의 협력을 통한 실질적 채무 감면과 취약 계층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고 답했다.
이재명 정부는 배드뱅크 구상 실현을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대선 후보 시절 TV토론회에서 자영업자 빚 문제와 관련해 “단순 채무조정을 넘어 실질적인 채무 탕감이 필요하다”고 말한 이 대통령은 부실 채권을 매입하고 이를 처분하는 전문기관인 배드뱅크 설치를 공약으로 내놨다.
이 대통령은 금융당국을 통해 배드뱅크 설립을 위한 사전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 지난 5일 금융위원회는 기존 은행·저축은행 등 금융회사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만 허용하던 개인 금융 채권 매입을 비영리법인에도 허용하는 내용의 감독규정 변경을 예고했다. 이외에도 캠코 산하에 별도 기금을 설치해 채권 매입에 나서는 방안 등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채무를 탕감해 주는 정책이 채무자들에게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와 같은 ‘도덕적 해이’ 논란에 대해 박 이사장은 “장기연체 채무자들은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갚고 싶어도 못 갚는 사람’이다. 이들은 이미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취약계층이므로 형평성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했다.
이어 “금융기관들은 부실채권이 발생할 것을 고려하고 대출을 운영하기 때문에 채권자는 부실채권을 헐값에 매각하고 추가 이익을 취한다”며 “오히려 회수 가능성이 없는 채권을 내버려두는 것이 정부 지출과 시장 노동력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부연했다.
채무조정 신청 후 추심에 시달린다…“채무조정기구 근본 목적 성찰 필요”
과거 정부들도 배드뱅크와 유사한 채무조정기구를 운영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미미했다는 평가다. 2013년 국민행복기금, 2018년 장기소액연체자 지원재단, 2022년 새출발기금 등 취약 차주의 채권을 사서 채무조정에 나서는 방식은 정부마다 등장했다. 다만 성과는 부실하다. 올해 4월 말 기준 새출발기금 채무조정 신청 채무액 20조3173억원 중 실제 채무조정 성과는 5조7997억원에 불과해 약정 체결률은 28% 수준에 그쳤다.
이에 대해 박 이사장은 제도 설계 미비, 실질적 채무 감면 부족, 접근성의 한계 등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제도 설계가 미비해 정책 목표와 현장 상황이 괴리되면서 실효성 있는 기준과 절차 마련이 부족했다”며 “또한 감면 폭이 제한적이고 상환 부담이 여전해 근본적 재기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전했다. 이어 “정보 부족, 복잡한 절차, 협약 금융기관 제한 등으로 실질적 지원이 필요한 이들이 배제되는 경우도 다수였다”고 했다.
특히 박 이사장은 채권 회수 실적에만 매몰됐던 그간 채무조정기구들의 행태를 강도 높게 지적했다. 그는 “채무조정기구가 신용정보회사에 추심을 위임하는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며 “추심 실적에 따라 수수료가 책정되는 구조에서는 불법 추심, 소멸시효 연장 등 각종 탈법 행위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새 정부 배드뱅크 “채무 탕감 넘어 사회적 복귀 도와야”
새 정부의 배드뱅크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명확하고 엄격한 선별 기준과 규모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박 이사장의 견해다. 박 이사장은 “정말로 상환능력이 없는 취약계층, 장기연체자 등 구조적으로 회복이 어려운 채무자에게만 선별적으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투명하고 엄격한 심사 기준이 마련돼야 도덕적 해이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이번 배드뱅크는 충분한 재원을 바탕으로 신속하고 대규모로 채무 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정부가 먼저 부실채권을 적극 매입해서 정리하는 ‘능동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이재명 정부의 배드뱅크 구상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원칙을 하나만 골라달라’는 질문에 박 이사장은 “채무자의 실질적 재기 지원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답했다. 단순 채무 탕감이나 소각에 그치지 않고 채무자가 경제적으로 재기할 수 있도록 복지, 고용, 금융 교육 등의 연계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단순한 부실채권 매입과 추심 업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채무자가 정상적인 경제 활동과 사회 복귀를 할 수 있도록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재기 지원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