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정치가 위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소설가 이문열(60·한국외대 석좌교수)씨는 “우리 대의민주정은 지쳐있고, 그 어느 때보다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전날 같은 자리에 초청됐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도 “대한민국의 나라 다스리기(거버넌스)에 심각한 고장이 난 징후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진보와 보수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두 원로가 공통적으로 정치의 위기를 거론한 것은 주목된다. 그러나 위기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은 각기 달랐다. 백 교수가 현재의 위기를 거버넌스의 위기로 규정하고 민(民)의 국정 참여를 확대하라고 주장했다면, 이씨는 대의민주정치의 위기가 위기의 본질이며 이를 불러온 것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불복(不服)의 문화라고 분석했다.
이씨는 ‘지친 대의민주정과 불복의 구조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오래된 시위문화나 저항전통을 불복이라는 각도에서 재조명했다. 우리 사회에 ‘불복의 카르텔’이 존재하고, 불복의 문화가 구조화됨으로써 정권 뿐만 아니라 헌법체계의 근간인 대의민주제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대의민주정체의 다수결에 대한 불복의 유혹은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인정하면서도 “지금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에는 불복이 상시적인 구조로 자리 잡은 것 같다”고 우려했다. 단적인 예로 든 것이 지난해 촛불집회다. “대선과 총선으로 대표되는 대의제 다수결에 대한 불복이 거기에 집결했다”고 보는 이씨는 “오랜 불복의 경력을 가진 ‘그때 그 사람들’과 지난 10년 동안 신기득권층으로서 단맛을 즐긴 사람들, 그리고 지난 정권이 정성을 들여 기른 일부 시민단체가 카르텔을 형성하고, 의회를 뛰쳐나온 야당의원들이 그 앞장을 섬으로써, 이제 불복은 정교하고도 견고한 구조로 우리 사회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참여정부 시절 지금의 여당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 사태야말로 대표적인 불복사례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탄핵은 불복이 아니고 대의민주제에 충실한 결정이라고 본다”면서 “탄핵권은 대의민주제에서 인정하는 것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씨는 강연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참여민주주의 현상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는 “인터넷 광장의 착시현상은 소수를 다수로 보이게 하고, 익명성 뒤에 숨은 조작은 터무니없는 소수에게 대표성을 안겨주어 다수로 혼동하게 만든다”면서 “인터넷 광장에서의 다수는 현실에서의 다수와 질적인 측면에서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미네르바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우리의 지성 풍토가 정말이지 한심하다”면서 “네티즌과 언론의 과민반응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씨는 2004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을 맡는 등 보수정권 탄생에 힘을 보탰다. 그는 이명박 정부 1년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불만스럽고 성에 차지 않는다. 특히 소심과 우유부단을 비판하고 싶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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