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멋지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권력이다. 멋지지 않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한글은 멋진가? 좀더 구체적으로, 영어보다 멋진가? 이 질문은 영어 티셔츠를 더 많이 입고 영어 브랜드를 더 많이 사용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
한글은 그동안 디자인이나 스타일이란 말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실용성과 독창성에 관해서는 늘 높은 평가를 받지만, 아름다움이란 측면에서는 의문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은 “한글이 아름답지 않은 게 아니라 아름답게 진화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상봉의 한글 패션은 한글로 만들어낸 문화상품 가운데 근래 가장 성공한 경우로 꼽힌다.
그가 만든 한글 티셔츠는 김연아 선수가 입었고, 한글 스카프는 이명박 대통령이 둘렀다.
-얼마 전 아이스 쇼에서 김연아 선수가 한글 티셔츠를 입어 화제가 됐습니다. 어떻게 그 옷을 입히게 됐습니까?
“김연아 선수 측으로부터 한글 티셔츠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받았어요. 사실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옷이 안 예쁘면 국민 전체에게 욕을 먹을 거 아니예요? 예쁘면 ‘나도 입고 싶어’ 그럴 거고. 다행히 아름답다는 얘기가 많았어요. 김연아 선수와 같은 유명인사들이 입은 한글 패션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서 입도록 하는 것, 그게 내가 운동하는 방식이죠. ‘무한도전’(MBC 주말 오락프로그램)에 나가서 MC들에게 한글 티셔츠를 입힌 것도 같은 이유예요. 그게 효과가 있어요.”
한글 홍보대사이기도 한 이상봉의 한글 작업은 많이 알려져 있다. 과거의 작업을 들춰볼 것도 없이 올해 그가 관여한 한글 작업만 해도 목록이 길다. 지난달 13일 열린 ‘임시정부 수립 90주년 기념식’에 사용된 한글 스카프를 제작했고, 런던 한국문화원에서 16일까지 계속되는 한글기획전을 주관했다. 또 국가간 자동차 대회인 A1에 출전하는 한국대표팀 차량을 디자인했고, 해외봉사단 유니폼 제작에 착수했다.
-한글 패션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쇼를 해야 하니까 우리 것을 찾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글로 옷을 디자인하게 된 거죠. 사명감으로 시작한 것은 아닌데 갈수록 사명감을 느끼게 되네요. 일곱 시즌째 파리에서 한글 패션을 발표하다 보니까 ‘또 한글이냐’ 이런 반응도 있고, 우리 직원들 사이에서도 불평의 목소리가 나와요. 그렇지만 몇 년이나 했다고 벌써 그만두나요? 이제 시작이죠.”
이상봉은 2002년 세계 최고의 패션쇼 무대라는 ‘파리 프레테 포르테’에 진출, 지금까지 매시즌 자신의 쇼를 진행해왔다. 2006년부터는 쇼마다 서너 벌의 한글 옷을 선보여 왔다. 그는 패션쇼를 100미터 육상 경기에 비유한다. 꼬박 석 달을 준비해야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기껏 10∼15분의 쇼가 된다.
-디자이너들 중에는 한글이 디자인의 걸림돌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에 찬성하십니까?
“잘못된 견해인 것 같아요. 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우리 스스로가 한글은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로 한글을 디자인에 적용해본 사람들이 얼마 안 돼요.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거의 다 회사 로고를 영어로 써요. 국내 업체들의 라벨을 조사해본 적이 있는데, 90%가 영어더군요. 이렇게 다들 영어만 쓰니까 한글 디자인을 할 필요도 없었죠.”
-디자인의 관점에서 한글이 잠재력이 있다고 확신합니까?
“제가 거래하는 나라가 다양해요. 도시도 다양하고 사람들도 다양하고. 그런데 그들이 내가 만든 한글 패션을 사가요. 꽤 비싼 옷인데 왜 사가겠어요? 매력이 있다는 거죠. 세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후한 점수를 한글에 줬어요.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한글 디자인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꼽는다면?
“한글의 문제는 진화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셔두기만 한 거죠. 너무 시도가 없었어요. 먹으로 쓴 한글, 색연필로 쓴 한글, 낙서하듯 쓴 한글, 서예가의 한글, 어린애가 쓴 한글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뒤집어 놓을 수도 있고, 자음 모음을 분리할 수도 있고. 트로트적인 한글, 재즈적인 한글, 팝적인 한글도 있을 수 있어요. 저는 요즘 글씨 안에 그림을 넣거나 그림 안에 글씨를 넣기도 해요. 깨트려야 돼요. 그래야 재창조가 가능해요.”
이상봉은 요즘 한글과 태극문양을 결합하는 작업을 자주 한다. 태극 무늬 안에 한글을 써넣거나, 한글 위에 태극 문양을 배치하는 식이다. 그는 “한글 뿐만 아니라 태극기도 맘대로 쓰게 내버려둬야 한다”고 말했다.
-한글 패션을 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한글을 연구했을 것 같은데 새로 발견한 매력이 있나요?
“한글 작업을 하기 전까지 저도 한글에 대해 무식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이 한글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문화재는 비교 대상이 있지만 한글은 유일무이하죠. 외국은 지나간 것을 열심히 찾고 있는데,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조차 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외국에서는 호평을 하는데 정작 국내에서 지금 한글을 갖고 뭘 하겠다는 거냐는 식으로 보면 안타깝죠. 분명한 것은 우리 것 없이 세계에 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요즘을 디자인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을 실감하십니까?
“오세훈 서울시장이 디자인을 들고 나왔죠. 이명박 대통령도 디자인을 언급했고.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것도 역시 디자인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제품을 만들어서 살아왔는데 여기서 점프하는 건 디자인에서 나와요. 예전에는 디자인이 기술을 쫓아갔지만 지금은 기술이 디자인에 아부하는 시대예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란 말로 다 묶어져요. 자동차도 디자인, 도시도 디자인이죠. 디자인 시대에 살고 있고, 디자인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시대가 됐어요.”
-어떤 디자인을 추구하십니까?
“디자인이나 패션은 맨 앞에서 가는 겁니다. 난 뭔가 리드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우리의 생활이나 생각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 자극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죽하면 제가 나이를 버렸겠어요? 제 자신이 정체되는 게 너무 두렵기 때문이예요.”
-나이가 몇이신가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서른일곱이죠, 하하. 실제로 내 나이가 얼마인지 헷갈려요. 서른일곱 이후로 나이를 밝혀본 적이 없으니까요. 가끔 공문서를 작성해야 할 때 내 나이가 얼마인지 확인해요. 그리곤 바로 잊어버려요. 자식들은 모두 출가시켰어요.”글·사진=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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