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얘기다. 이 부부 이야기에는 속편이 있다. 속편의 주인공은 아내다. 유능한 의사였던 그녀는 나이 마흔에 유학을 결정했다. 남편은 한국에 남겨둔 채 미국에서 법학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지난해 초 한국으로 돌아온 40대 중반의 아내는 병원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대신 카이스트에서 특허법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새 인생을 선택했다.
안철수(47) 김미경(46) 부부는 요즘 같이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중이다. 아내를 따라서 지난해 가을부터 남편도 카이스트로 왔기 때문이다. 너무 유명한 남편과 달리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김미경 교수가 지난 주 자신의 연구실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남편과 같이 근무하니까 좋으세요?
“(창 밖의 한 건물을 가리키며) 남편 연구실이 저기예요. 아주 가깝죠? 그동안 너무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지금 우리 가족에게는 같이 사는 게 가장 중요해요. 가족끼리 같이 있을 시간을 확보하는데 제일 신경을 쓰고 있죠. 제가 여기에 없었다면 남편이 카이스트로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
-새학기가 시작됐는데 어떤 강의를 맡으셨나요?
“월요일마다 3시간짜리 강의가 있어요. 기술경영전문대학원과 의과학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죠. 바이오테크놀로지와 관련된 법과 제도를 가르치는데 특히 특허법이 제 전공이예요. 남편도 같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해요. 창업과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고 있어요.”
-왜 마흔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거죠? 의사 생활에 싫증이 났었나요?
“의학에 대한 그리움이 지금도 있어요. 그렇지만 의사로 사는 건 좀 개인적인 것 같아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신문을 봐도 판단기준이 없고. 정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는데, 의약분업이 한참 논란이 되고 있을 때 제가 뭐가 옳은지 모르겠더라구요. 나도 세상에 대해 생각도 하고 시각도 좀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좀 늦었지만 공부를 해보자, 그렇게 된 거예요.”
-법학을 선택한 것도 의외입니다.
“저는 병리의사를 오래 했기 때문에 분자생물학이나 테크놀로지와 굉장히 관련이 많았어요. 지적재산권이나 특허법, 의료법 등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한국에서 공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법대는 사법고시 준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제대로 공부하기 어려웠어요. 또 새로 만들어지는 법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되는 경향이 있고, 바이오테크놀로지의 가장 큰 시장이 미국이기도 하고,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편인가요?
“두렵기도 했죠. 고민 오래 했어요. 2001년 초에 법대 갈까 처음 생각했고, 이듬해 7월에야 떠났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요, 그래도 가는 게 낫겠다, 그렇게 정리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가 싫지 않았어요. 병원이 고향처럼 익숙하고 좋았고. 그런데 지금 안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많으니까. 이전의 경험에서도 보면 진보적인 방향으로 선택하는 게 항상 후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의학과 법학은 둘 다 매우 어려운 학문입니다. 혹시 공부하는 일에 고통을 안 느끼나요?
“물론 힘들어요. 특히 영어가 어려웠어요. 말하는 것도 잘 안되는데 법률영어를 해야 하니까. 1학년 때 상당히 고전했어요. 수업이 끝나는 순간부터 복습을 시작해야 했어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집에 와서 음식을 먹으면서, 그리고 잠을 줄이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해야 간신히 다음 날 아침 수업을 따라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깨어있는 동안 계속 공부를 해야 했어요. 그때 커피도 엄청 마셨고. 그렇게 3년간 했어요.”
-딸을 키우면서 어떻게 학위를 받을 수 있었나요?
“딸은 제가 항상 데리고 다니고 싶었어요. 그래서 중학생 딸을 데려간 거죠. 딸과 함께 도서관에 다녔던 기억밖에 없어요. 제 딸은 학교로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어요. 그래서 저는 딸을 픽업해서 같이 동네 도서관으로 갔죠.”
-따님이 지금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걸로 압니다. 자녀교육법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을 듯 합니다.
“다른 부모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시간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남는 시간을 전부 딸과 같이 보냈어요. 학회 갈 때도 딸을 데리고 다녔고, 단국대 교수 시절 천안으로 강의하러 갈 때도 데리고 갔어요. 집에서 봐줄 사람이 없을 때는 어쩌겠어요, 같이 다녀야지. 조교실에 딸을 맡겨놓고 강의를 하곤 했어요. 딸이랑 같이 고생했던 기억이 참 많아요. 다행히 딸이 엄마 생활이 어떤지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좀 크더니 ‘엄마가 보통 아줌마처럼 되는 거 싫어요. 학교에 사표내지 마세요’ 그러더군요. 애들은 다 자기 환경에 적응하는 것 같아요. 엄마가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만 느낄 수 있다면 다 참아낼 수 있어요.”
-안철수 교수도 그렇고 김미경 교수도 그렇고 너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이뤄내는 듯해서 우리들과는 왠지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40대에 공부를 한 건 남편이 도와줬기 때문이예요. 우리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고. 운이 좋은 사람들인 거죠. 그런 점에서 감사해요. 그렇지만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뭘 시작하면 끝을 맺으려고 했어요. 일단 시작해 놓고, 힘들어도 그 일을 계속 하면, 일을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아요. 곰처럼 해요.”
-혹시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까?
“법대 다닐 때 연방법원 여자 판사를 모시고 인턴을 했어요. 어느 날 애로를 물어보니까 법대 동창들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다들 변호사들인데 너무 가까워지면 판결에 바이어스(편견)가 생길 수 있다고. 미국 연방법원 판사들은 상당히 고립돼 살아요. 심지어 옆방 판사들하고도 사건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아요. 그들의 직업윤리에 감동했어요. 사회봉사에 대한 태도도 인상적이었어요. 그 판사는 평소엔 맹인안내견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어요. 휴가 때는 아프리카에 가서 후진국들의 법제도 만드는 일을 돕고. 또 아주 오래된 차를 끌었어요. 생활은 검소하면서도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 보냈죠. 전 사람들에게 배우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남편과 관련된 질문을 해보죠. 의사에서 벤처기업가로 변신하더니 회사 설립 10년만에 경영에서 물러났고, MBA를 하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가장의 이런 변화들이 아내로서 힘들지 않았나요?
“회사 그만 둘 때는 남편이 많이 지쳐있었어요. 그래서 좀 쉴 수 있겠다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남편이 의사 그만 둘 때는 힘들었던 같아요. 같은 의대를 나왔어도, 이런 말 낯뜨겁지만, 전 남편이 천재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공부를 하면 노벨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많이 섭섭했어요.”
-남편이 정치를 하겠다면 말리시겠습니까?
“서울시장 얘기나 정보통신부 장관 얘기를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남편이 하겠다고 하면 사회봉사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가장 적절한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저희는 다 이과 출신이고 주변에 정치인이 한 명도 없어요. 아마 의사 그만 둔다고 했을 때 만큼은 반대할 것 같아요. 너무 소모적이지 않을까요? 저는 남편의 이공학도로서의 재능이 항상 아쉬워요. 책을 쓰는 게 보다 남편에게 맞지 않나 생각해요.” 대전=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김미경 누구인가
서울대 의대 본과 2학년 때 1년 선배인 안철수씨를 처음 만났다. 결혼 후 의사로 15년간 일했다. 2002년 성균관대와 삼성의료원 병리학 부교수직을 던지고,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주립대 법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2005년 스탠포드대 법대에 진학, 생명과학과 법 문제를 연구했다.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땄고, 2006년에는 스탠포드 의대에서 조교수 겸직 발령도 받았다. 국내 유명 사립대학들이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2008년 3월 카이스트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