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이효리는 국내 가요계에 있어서 무척 특이한 존재다. 지난 1998년 핑클 멤버로 데뷔한 그녀는 우후죽순으로 쏟아진 아이돌 그룹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10년 넘도록 시장 지배력을 잃지 않고 있다. 최근 데뷔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효리를 롤 모델로 꼽는 이유에 굳이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다, 소속사의 일방적인 통제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아이돌 그룹으로 출발, 그룹 해체와 솔로 데뷔를 거쳐 가요계 정상으로 올라선 그녀의 끈질긴 생명력, 바로 그것이다.
적어도 국내 내수 시장만 놓고 보면 이효리는 가요계 여왕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상업적 가치의 척도라고 일컬어지는 광고 시장에서 그녀는 아직도 최고의 블루칩이자, 트렌드 리더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21세에 데뷔한 그녀가 올해 데뷔 12년차 32세인 것을 감안하면 새삼 더욱 놀랍다. 그동안 대중이 30대 여성 연예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저 한물 간 스타였다. 남성 연예인에게 성숙함을 무기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30대가 여성 연예인에게는 은퇴를 고려해야 하는 족쇄였다.
하지만 이효리는 달랐다. 비록 그녀의 원치 않은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돌 그룹 리더의 소녀 이미지는 핑클 3집 타이틀 곡 ‘나우(Now)’로 섹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변했다. 덕분에 이효리는 핑클 4집부터 솔로 데뷔에 이르기까지 옐로 저널리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가판대 스포츠신문 1면을 독점했다. 가슴 성형부터 이성 친구 교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대중에게 전달됐다. ‘효리 세상’, ‘효리 천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지적 섹시’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비유가 쏟아졌다.
장나라의 귀여운 이미지가 퇴조하고 있을 무렵 혜성처럼 등장한 솔로 가수 이효리에게 대중이 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소녀에서 숙녀로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지극히 관음적인 시선은 그녀를 단숨에 섹시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10분 만에 남성을 유혹한다는 자극적인 가사와 화려한 춤사위를 강조한 그녀의 솔로 데뷔곡 ‘텐 미닛(10 Minutes)’은 이 같은 분위기에서 지상파 가요대상을 석권했다.
이효리는 무대에서 10분 동안 시청자를 유혹하는 동시에 KBS ‘해피투게더’를 시작으로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자연스럽고 털털한 이미지를 대중에 심어줬다. 천방지축 왈가닥 이미지는 당시에도 그녀의 인기를 공고히 하는 긍정적인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30대에 들어서 더욱 빛나고 있다. 팬층이 특정 연령대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아이돌 그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효리는 남녀노소 누구나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연예인으로 변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이효리의 아성은 2005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야심차게 연기자로 변신한 SBS 드라마 ‘세잎 클로버’는 시청률 부진과 연기력 논란이 겹쳐 조기 종영했다. 절치부심 끝에 이듬해 내놓은 정규 2집도 타이틀 곡 ‘겟 챠(Get Ya’)’는 표절 시비로 인해 일찌감치 간판을 내렸다. 삼성 휴대폰 브랜드를 활용한 싱글 ‘애니모션(Anymotion)’과 ‘애니클럽(Anyclub)’으로 반짝 인기를 누렸지만 ‘애니스타(Anystar)’는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뮤직 드라마를 차용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도 실패했다. SBS ‘일요일이 좋다-체인지’에서 한 시민이 “이제 그만 나오면 될 것 같은데”라고 혹평을 내놓을 정도로 이효리의 2006년과 2007년은 우울함의 연속이었고, 추락 그 자체였다.
위기의 이효리는 다시 가요계로 돌아갔다. 특집 프로그램 진행을 제외하고는 일절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오직 신보 녹음에만 매달렸다. 이효리 3집은 그렇게 2008년 7월에 나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존 작곡가를 배제하고 신인 작곡가를 기용한 타이틀 곡 ‘유고걸(U-Go-Girl)’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저 섹시 아이콘으로만 인식돼 비평적으로 파산을 선고 받은 1집과 2집과 달리 3집이 음악성으로 주목을 받은 것도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고작 한 곡의 3~4마디, 그것도 후렴구는 리드 싱어 옥주현에게 미뤘던 핑클 시절, 어딘지 모르게 곡과 어울리지 않고 겉돌기 일쑤였던 솔로 1집과 2집을 넘어 가장 자신과 어울리는 목소리를 이효리는 3집에서 찾았다. 그녀는 ‘유고걸’에서 아무 꾸밈없이 시종일관 활짝 웃었고 화려한 의상 대신 빈티지를 입었다. 도발적인 안무는 세기를 낮춰 자연스러운 율동으로 변했다. 자연히 라이브 보컬이 살아났다. 한물 간 이효리가 가요계 중심으로 귀환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SBS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했다. 유재석과 국민 남매로 짝을 이룬 이효리는 사실상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축으로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마음껏 발산했다. 서른 살을 넘는 징표와 같은 눈가의 주름을 내보이고 소탈한 성격을 그대로 내비치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핑클 리더에서 솔로 데뷔, 그렇게 찾아온 첫 번째 전성기가 산산히 부서진 후 다시 도래한 두 번째 전성기이기에 이효리 4집에 대한 관심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가요계가 10년 만에 아이돌 전성시대로 변한 마당에 앨범 발표 시기가 좋지 않다는 평가에서부터 과연 3집의 인기를 재현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네 번째 앨범은 온갖 의문부호가 붙었다.
불법 음원유출 사고로 인해 지난 12일 하루 빨리 발표한 이효리 4집 ‘에이치 로직(H-Logic)’은 앨범 전체에 자신감이 흐른다. 다소 거만스럽게 보일 정도다. 첫 트랙 ‘아임 백(I’m Back)’의 “비슷하게 날 따라해. 허락도 없이 내 use my name. 아무리 날 따라해 봐도 나는 매년 나는 매번 앞서가는 걸”이라는 가사가 대표적이다. 타이틀 곡 ‘치티치티 뱅뱅(Chitty Chitty Bang Bang)’의 “너의 말이 그냥 나는 웃긴다. 여기까지 혼자 왔어 나. 손 내밀 때 어디 있었나”라는 가사도 마찬가지다. 실제 연주를 듣는 듯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리얼 사운드’로 칭한 자신감처럼 시종일관 당당함을 강조한다.
사실 그동안 이효리는 앨범 수록곡 가사를 통해 나름대로 발전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집은 그저 도발적인 안무로 섹시 아이콘에 머물렀지만 2집 ‘겟 챠’에서부터 가사에 공을 들인 흔적이 있다. 그녀는 ‘겟 챠’에서 “오직 시선은 짧은 치마로 그게 다였지. 너를 움직일 나의 노래로 너를 바꿔봐”라고 주문했고 ‘유고걸’에서 “이제부터 솔직하게 이제부터 당당하게”로 자의식을 확장했다. ‘이발소 집 딸’에서는 “저기 멀리 나를 보는 화려한 차림 속에 웃는 내 얼굴. 때론 나조차 그 모습에 익숙해져 잊고 살진 않았을까”라고 자기 연민의 정서를 내보이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이효리 4집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미지 재탕을 최대한 줄이려 애쓴 흔적이다. 솔직히 이효리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가수가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쉬울 수 있다.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로 잘 나가는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을 수도 있고, 아직 국내에 잔존하고 있는 미디엄 템포의 R&B를 해도 될 일이다. 정규 앨범 대신 디지털 싱글로 공략하는 검증된 공식도 있다.
하지만 이효리는 무려 1년 가까이를 앨범 프로듀싱에 매달렸고, 최근 들어 찾아보기 힘들게 된 형식인 신곡 14곡을 정규 앨범에 수록했다. 섹시 이미지를 반복한 기대 이하인 곡도 있지만 생경한 느낌의 곡도 다수다. 유명 작곡가에 기대 평범하다 못해 닳고 닳은 장르와 멜로디를 들고 나오는 일부 가수들을 마치 가르치는 모습이다. 비록 한류도 없고, 해외에서 인지도가 전무할지라도 국내에서만큼은 ‘이효리 브랜드’를 깊이 뿌리 내리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특정 멜로디를 부분적으로 역순 반복해 각인시키는 전작 ‘유고걸’의 방식을 차용한 타이틀 곡 ‘치티치티 뱅뱅’의 안전한 답습은 다소 아쉽다. 미국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레이디 가가의 이미지가 계속 떠오른다는 점도 부담거리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