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지구촌] “잃어버린 15년을 되돌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일본 도쿄전력 여성 간부 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가 밝혀진 네팔인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46·사진)는 최근 심정을 이같이 밝혔다.
2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마이나리가 이곳에서 쓴 일기를 정리한 책 ‘일본 형무소에서의 15년’이 이달 말 출간된다. 그는 1997년 도쿄 시부야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잡혀 요코하마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지난해 6월 최신 DNA 감정을 통해 누명을 벗었다.
13권의 노트에 기록된 수감 일기에는 억울한 마음과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것이라는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감방 거울에 비친 머리카락이 점점 백발이 되어 가늘어진다. 나이를 느끼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도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고생의 결과”라는 대목에선 깊은 회한이 배어나온다. 2008년 네팔의 군주제 폐지 소식을 접하고 “고국의 역사적 순간을 타국의 교도소에서 듣게 되는 악연”이라고 표현한 부분도 있다.
마이나리는 15년간의 억울한 수감생활을 “지옥 같았다”고 했다. 그는 교도관이 “너는 일본 여성을 살해한 나쁜 놈이다”라고 말할 때마다 얻어맞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마이나리는 일본 경찰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갔고 조서에 서명할 것을 겁박했다고 이야기한다. 수사관들에게 폭행도 당했고, 물을 마실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다. 경찰이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 진술을 강요한 사실도 드러났다.
마이나리는 사건 3년 전 아내와 갓 태어난 두 딸을 고향에 남겨두고 혼자 일본으로 건너와 도쿄 오다이바의 인도 카레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동료 네팔인들과 기거하며 월급의 대부분을 네팔로 송금하던 성실한 가장이었다.
그러던 중 도쿄 시부야 길거리에서 매춘을 벌이던 도쿄전력 기획부 경제조사실 팀장 와타나베 야스코(당시 40세)가 살해된 채 발견되자 현지 경찰은 살해 현장 부근 아파트에 살던 마이나리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당시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던 마이나리는 2000년 4월 1심 판결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도쿄 고등법원은 같은해 12월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이어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격)가 상고를 기각하며 형이 확정됐다.
그는 형이 확정되던 날 “인생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듯한 절망적인 기분이었다”면서 15년간 눈물이 났던 것은 이 날 한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구치소로 이송되는 순간에도 무죄가 드러날 때까지 절망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들려주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잃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한 이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원망의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이해하기 힘든 ‘역전 판결’에 일본 재야 법조계와 시민사회 단체들은 외국인 차별이라고 반발하면서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동안 마이나리를 지원해 온 ‘무죄인 고빈다씨를 지지하는 모임’은 지난달 24일 도쿄에서 총회를 열어 해산을 발표하며 앞으로 무고한 수감 피해자 구제를 담당할 시민단체를 설립할 것이라고 밝혔다. 억울하게 수감된 네팔 이주노동자를 지원해 왔던 회원 60여명이 참석한 총회에서 변호인단의 대표를 맡았던 츠쿠타 가즈히코 변호사는 “그가 잃은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오판의 책임은 무겁다”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논픽션 작가 사노 신이치는 마이나리의 모든 공판을 방청하며 이 사건을 ‘도쿄전력 OL(오피스 레이디) 살인 사건’이란 제목의 책으로 펴내 큰 반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사노 작가는 “피고가 만약 백인이나 한국인 또는 중국인이었다면 재판정이 과연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하며 “마이나리는 일본 정부의 최대 원조 수혜국인 네팔 출신이었기 때문에 원죄(寃罪·무고한 죄)를 뒤집어쓴 셈이다”라고 비판했다.
아내와 대학생이 된 두 딸과 함께 현재 네팔 카트만두에 살고 있는 마이나리에게 일본 정부는 형사보상법에 따라 6800만엔(약 8억1900만원) 정도의 보상금을 지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나리는 “외국 형무소에 갇힌 네팔인들이 많다. 나와 같은 경우도 적지 않다”면서 “무고한 수감 피해자 지원에 보상금의 일부를 기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