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1)] 심수봉 ‘미워요’, 사랑해의 다른 말

[한채윤의 뮤직에세이(1)] 심수봉 ‘미워요’, 사랑해의 다른 말

기사승인 2013-04-29 12:55:01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의 감정을 구분 짓기란 쉽지 않다. 어디까지가 좋아하는 마음이고 언제부터가 사랑인지, 당신을 좋아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 좋아하긴 하는데 사랑은 아닌 것도 같고, 여러 날 고민하고 꺼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무심코 툭 뱉기도 하는 말, 사랑해. 생각하면 할수록 실은 감정의 주체인 자신도 잘 모르겠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번 사랑한다 말해놓고 당장 ‘내일부터 누구세요?’ 하는 사이가 되고 보면 언제 우리가 사랑이라는 걸 했었나 싶기도 하고,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결론지으면 좀 덜 억울한 것도 같고. 오늘도 우리의 감정은 LIKE와 LOVE, 그 사이를 흐르는 강에서 표류하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을 구별하는 아주 쉬운 방법

좋아하던 사람은 싫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미운 거라고, 봄비가 내리던 추운 날 따뜻한 정종을 나누어 마시던 상냥한 그가 말해주었다. 원인이 상대에게 있던 나의 단순 변심이던 이유야 어떻든 어느 날 누군가가 싫어졌다면 그건 그저 그를 좋아했다는 반증이다.

사랑이 아니라. 같은 논리로 누군가가 밉다면 그를 사랑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의 반대말은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무방한 반면 사랑하는 사람의 반대말은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굳이 찾자면 관심 없는 사람쯤 될까.

LOVE는 LIKE와 성격이 달라서 사랑했던 사람이 밉다면 그건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은 뒤끝이 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이제야 알았담. 아니 어떻게 그동안 모르고 살 수 있었지? 그래도 몇 번의 연애를 경험했다면 이런 것쯤은 진즉에 알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이제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야. 대화를 마치며 상냥한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지나간 사랑을 하나씩 떠올려 좋아했던 사람과 사랑했던 사람을 각각의 상자에 나누어 담았다. 명쾌했다.

그 날 이후로 ‘싫어요’는 ‘좋아요’가 아닌데 ‘미워요’는 ‘사랑해’와 같은 말로 들린다. 미움의 크기로 사랑을 저울질 하다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심수봉, '미워요'. '죽도록 사랑하면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 보고 싶단 말도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가 얼마나 미웠을까?

너는 내가 싫어졌다고 했고 나는 그런 네가 미웠다

오래 전부터 '사랑밖에 난 몰라'를 좋아했다. 스무살 그 무렵, 영화 속에서 노래를 부르던 여배우들이 슬프면서도 참 예뻐 보였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인희가 그랬고 ‘너는 내 운명’의 은하가 그랬다. 그 때의 난 사랑을 몰랐지만 사랑밖에 모른다고 말하던 그녀들이 이유 없이 좋았다. 노래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가수 심수봉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철없이 사랑인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할 그때 그 사람 (‘그 때 그 사람’ 1979)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남자는 다 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1984)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 (‘사랑밖엔 난 몰라’ 1986)

술잔을 붙잡고 사랑의 노래를 붙잡고 남자 남자 남자의 눈물이 미워요 (‘미워요’ 1987)






애써 찾아 들은 적 없이도 너무나 익숙한 노래들이라 무심했던 가사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안에 여자의 사랑이 있다. 30년 전 내 또래였던 그녀는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 그런 걸 다 알았던 것 같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다 알았을 것 같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미워한다고, 나는 당신이 밉다고, 그에게 사랑을 전했다. 그 마음을 이제는 나도 알 것 같다.

미워요

기다려지는 전화가 있다. 한참동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보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한마디.

“밉다.”

순간, 뭔가 들킨 것 마냥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들켜버렸다.

한참 전에 끝나버린 사랑을 붙잡고 내내 힘들어 했는데 한때 연인이었던 그와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걷는 꿈을 꾸었다. 그동안 왜 그렇게 당신을 미워했는지 모르겠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던 장면이 생생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더 이상 그가 밉지 않았다.

내가 싫어졌다고 말하던 그가 아닌 내게 전화하지 않는 그가 밉다. 봄과 함께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오늘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명확해 지는 건, 그는 내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백만송이 장미' 1997)

나보다 열 살쯤 많은 그녀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라고 말한다. 이제 겨우 미움도 사랑이라는 걸 배웠는데 미워하는 마음 없이 사랑을 주라는 게 이해 될 리 없다. 십년 쯤 지나 그녀의 나이가 되면 알게 되려나. 그 때는 누가 알려주기 전에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 앨범 '한채윤 첫번째_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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