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도시가 된 이스탄불…천여명 부상
에르도안 총리 퇴진 요구…국제사회도 우려
[쿠키 지구촌] 터키 사태가 심상치 않다. 시위 중이던 여성이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했다는 현장의 증언이 나오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시위대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고, 국제사회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해커그룹 어나니머스는 터키 의회를 공격하겠다고 천명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의 집권 10년 간 최대의 위기”라고 전했다.
피로 물든 이스탄불
주말을 맞아 수십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스탄불은 경찰이 헬기를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공포의 도시가 됐다. 트위터에서는 현재 이스탄불에 체류중이라는 한국인 회원(@listentothecity)이 “이스탄불 신시가지 쪽에는 헬리콥터 소리가 계속 하늘을 진동하고 있다”며 “아름다운 도시가 공포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인 배낭여행객 2명이 최루탄에 맞았다”며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경고도 없이 최루탄과물대포를 쏘다니 정말 어이없었다. 그러나 10년간 터키 국민들을 탄압해온 현정권에 너무나 염증을 느낀 시민들은 중산층, 서민, 집시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하고 있다. 눈 앞에서 머리에 플라스틱 총알을 맞은 분이 피를 철철 흘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독한 최루액에 기절했다. 하지만 터키 시민들은 서로 레몬과 물을 나누며 그리고 호텔들 가게들 모두가 도우며 함께 싸우고 있다”고 현을 묘사했다.
터키의 언론 통제로 시위 상황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것도 혼란을 불러오고 있다. 가디언지는 “시위 중이던 여성이 사망했다는 보도도 있다”며 “군대가 경찰의 시위 진압 협조 요청을 거부했고, 일부 경찰이 시위대를 지지하며 탈영했다는 증언도 나온다”고 전했다.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1일 하룻동안 939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체포됐다. 터키 내무부는 “전국적으로 48개 도시 9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며 이같이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이스탄불에서만 1000여명이 부상을 당했고 앙카라에서도 수백명이 다쳤다는 의료진들의 증언을 보도했다.
현장에서 시위대가 찍어 올리는 사진은 끔찍하다. 탁심광장과 인근 보스포러스대교는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가득 메웠다. 이들은 시위를 촉발할 탁심광장 게지공원의 재개발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에르도안 총리의 민영화 정책과 한-터키 자유무역협정 등 경제정책과 전체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하는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은 탁심광장에 오늘도, 내일도 있을 것이며 극단주의자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곳이 되도록 두지는 않겠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20명이 모여서 시위를 한다면, 나는 2만명을 모으겠다. 10만명이 모인다면 나는 100만명의 당원을 동원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경찰은 초강경 진압에 들어갔다. 헬기를 동원해 공중에서 최류탄을 뿌리고 오렌지색 신경가스를 살포했다. 거리에 쓰러진 시민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도 사진에 찍혔다. 이스탄불 거리에는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머리가 찢겨진 여성이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고, 최류탄과 신경가스가 주택가까지 파고들어 어머니가 아기를 지켜달라고 외치는 장면도 목격됐다. 이스탄불 거리에서 시위대에게 레몬과 물을 나눠주고 있던 한 가게 주인은 “총리가 국민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며 “정권이 도를 넘어섰다”고 비난했다.
시위대도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차량에 불을 지르며 맞섰다. 긴장이 고조되자 압둘라 귤 대통령이 이날 밤 늦게 경찰에 철수를 지시했다. 탁심 광장 주변에서는 새벽까지 시위가 벌어졌으나 날이 밝으면서 평온을 되찾았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에르도안 총리 퇴진 요구 확산
시위가 거세지던 31일, 에르도안 총리는 자신의 트위터에 “최류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는 글을 올렸다.
에르도안 총리는 10년의 집권 기간 동안 터키를 유럽연합에 접근시키고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를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터키 국민들은 여전히 에르도안 총리에게 높은 지지율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전체주의적인 통치방식과 이슬람 색채를 강조하는 과도한 종교적 보수주의는 이슬람 세속주의 민주국가라는 독특한 형태를 유지해온 터키의 정체성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반발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에도 주류 판매를 더 엄격히 제한하고 공공장소에서 남녀간 애정 표시를 규제해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스탄불 보르포루스 대학 코라이 칼리스칸 교수는 “에르도안 총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터키는 그의 왕국이 아니다. 수도 앙카라에 앉아 이스탄불을 통치할 수는 없다”고 비난했다. 역사학자인 우구르 타녜리는 “진짜 문제는 탁심 광장의 재개발이 아니라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없다는 점”이라며 “국민들은 총리가 마음대로 정책을 결정한다고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앙카라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한 60대의 메흐메트 하스피나르씨는 “모든 독재자들은 언제나 국민을 억압하려 했다”며 에르도안 총리를 비난했다.
이번 시위는 탁심 광장의 게지공원을 없애고 대형 쇼핑몰을 짓는 공사를 저지하고자 지난달 28일 시민단체인 ‘탁심연대’가 공원을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탁심 광장은 터키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또 게지공원은 이 지역 내 남은 마지막 숲이이다. 탁심연대를 주축으로 한 시위대는 게지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보초를 서면서 숲의 중요성을 알리고 묘목 심기와 미니 콘서트 등을 벌여왔다.
그러다 지난달 30일 이 곳에서 벌어지던 소규모 집회에 경찰이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면서 과잉진압을 하면서 오히려 사태가 악화됐다.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들면서 시위대 규모가 급속히 늘었다. 반정부 구호도 등장했다.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평화민주당의 중진 의원들도 시위 현장을 방문해 공사 현장을 가로막는 등 시위대에 동참했다.
탁심광장에서 열린 집회에는 야권 지지자들과 함께 이슬람 소수파인 쿠르드당 지지자들과 이스탄불의 라이벌 축구팀 팬들이 한자리에 모여 춤을 추는 광경이 목격됐다. 에르도안 총리에 반대하는 세력이 하나의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시위가 확산되자 1일 밤 귤 대통령이 나서 긴급성명을 발표, “민주 국가에서 반대는 법규를 지켜야만 용인될 수 있으며 당국도 반대나 우려를 표명하는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시위대와 경찰 양측에 상식을 되찾아 달라고 요구했다.
젠 사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건강한 민주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터키 정부의 강경 진압을 우려했다. 유럽연합은 다음주 터키 법무부와 접촉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는 1일 터키 시위를 지지하고 에르도안 총리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 트위터 @fatty_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