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치 7개월 만에 최대 급락
서울 외환시장에서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4.1원 오른 1084.5원에 거래를 마쳤다. 벤 버냉키 전 미 연준 의장의 테이퍼링 가능성 언급에 신흥국 통화가치가 급락했던 지난해 6월 20일(14.9원 상승) 이후 가장 가파른 상승폭이다. 이날 원화가치 하락률(-1.32%)은 지난 1월 전체 하락률(-1.40%)과 맞먹는다. 전문가들은 달러와 대비 원화가치 급락은 미국 테이퍼링에 따른 신흥국 금융 불안과 중국 경기둔화 우려에 따라 달러 매수세가 급증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국 테이퍼링 후폭풍에 코스피지수 1920선도 무너졌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지난주 마지막 거래일보다 21.19포인트(1.09%) 내린 1919.96으로 장을 마쳤다. 외국인은 4000억원 이상 순매도했다. 증시 일각에선 신흥국 통화·주가·채권의 트리플 약세 현상이 나타나면서 코스피가 1900선 아래로 밀릴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일본 닛케이지수도 지난주 마지막 거래일보다 295.40포인트(1.98%) 내린 1만4619.13으로 마감했다.
신흥국 금융위기 확산
미 연준의 100억 달러 추가 테이퍼링 결정에 앞서 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인도 등이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해 금리인상까지 단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으로 나갔던 자금이 선진국으로 되돌아오는 기조가 명확해지자 오히려 금융불안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지난주(1월27~31일) 주요 20개국 중 17개국의 주가지수가 하락했으며 이 중 러시아, 터키, 일본, 태국, 인도 등 7개국 주가지수는 2% 넘게 떨어졌다. 1월 중 헝가리와 폴란드 통화가치도 각각 6.6%, 4.1% 하락, 금융 불안이 일부 동유럽 국가로 확산될 조짐도 보인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통화가치 폭락, 외환보유고 급감, 물가 급등이라는 ‘삼중고’로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브라질 일간지 에스타도 데 상파울루는 2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사상 최악의 정치·경제·사회적 위기로 일컬어지는 2002년을 떠올리게 한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최근 12개월 간 37.87%나 추락했고, 외환보유액은 1월 말 282억7000만 달러로 2006년 10월 이래 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부 신흥국은 미 연준의 일방적인 추가 테이퍼링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라구람 라잔 인도중앙은행(RBI) 총재는 “국제적인 통화 협력이 깨졌다”며 “자기들 편의대로 일을 벌인 다음 신흥시장은 알아서 하라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정부, 외화유동성 점검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이날 임원회의에서 “금융회사의 외화자금 조달과 운용 등 외화유동성 상황 전반에 대한 점검을 한층 더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이날 국내 7개 시중은행 외화자금부장과 관련 부서를 모두 소집해 외화유동성 상황 점검회의를 긴급 개최했다.
금융당국은 신흥국 금융위기가 외화자금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적이라는 판단하고 있다. 외화유동성이 풍부한 데다 인도,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등 신흥 9개국에 대한 한국의 외화익스포저는 78억4000만 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외불안이 연중 상시화돼 글로벌 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최근 시장 변동성은 선거 등 주요 신흥국의 정치적 불안, 중국의 경기 둔화 등과 맞물리면서 장기화할 가능성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