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입고 먹는 일상이 불가능한 1급 지체장애인이다. 어쩌다 인권교육 강사로 나가 7만~8만원씩 벌기도 하지만 고정수입은 아니다. 이 집에 사는 여든 전후 노부모와 중증장애인 이씨 중 누구도 일해서 생활비를 벌 근로능력은 없다. 세 사람의 한달 수입은 1층 방에서 나오는 월세 25만원과 부모의 기초노령연금 15만8600원, 이씨의 장애인연금 11만8000원 총 50만원 남짓이 전부다. 공과금 20만원 내고 나면 세 사람 반찬값 대기도 빠듯한 액수다.
한 때 이씨는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선정돼 독립할 꿈에 부풀었다. 수급권자만 되면 생활비(생계·주거급여) 뿐만 아니라 병원비(의료급여)를 받고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때 내는 본인부담금도 면제받을 수 있다. 일 못하고 수입도 없는 중증장애인이니 수급권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인 듯싶었다. 주민센터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다. “부양의무자인 아버지에게 집이 있어서 어려울 겁니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르면 소득인정액(소득+재산의 소득환산액)이 월 290만원 이상인 직계혈족과 배우자에게는 부양의무가 부과된다. 이씨의 부양의무자가 일할 수 없는 70~80대 노부모라는 점, 그들이 가진 재산 역시 현금화가 불가능한 거주 주택이라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는다.
1급 뇌병변 장애를 갖고 태어난 하상윤(41)씨는 30여년 연락을 끊고 산 아버지 때문에 수급권을 거부당했다. 어릴 적부터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살아온 하씨는 거주시설의 비리를 폭로한 뒤 뛰쳐나와 현재는 체험홈(장애인 자립을 돕기 위한 가정 형태의 소규모 거주시설)에 머물고 있다. 체험홈 최대 거주기간은 2년이다. 이 기간이 끝나면 하씨는 갈 곳이 없다. 일을 하지 못하는 하씨가 홀로 설 방법은 한 가지,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양의무자인 아버지의 존재 때문에 하씨에게는 수급자격이 없었다. 하씨는 “도와준 적도 없고 연락도 안 하고 지내는 아버지 때문에 당장 12월부터는 갈 곳이 없다”며 답답해했다.
기초생활보장제의 부양의무 조항은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희생자를 낳았다. 수십 년 전 연락이 끊긴 가족, 이혼한 전 배우자의 자녀, 근로능력이 없는 고령의 부모 등 법적 의무는 있으나 실제로는 부양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부양의무자들 때문에 빈곤의 사각지대에 빠진 이들은 줄줄이 목숨을 끊었다.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사각지대가 무려 117만명이다. 국회 계류 중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을 놓고 설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문가들과 야당,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일단 “노인과 장애인 같은 취약계층부터라도 부양의무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아직 정부와 시민단체쪽 의견 차이는 큰 편이다. 시민단체는 전면폐지를 주장하는 반면, 정부는 부양의부자를 선정하는 소득인정액 기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선하자는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하지만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정부의 개편안 작업에 참여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대명 기초보장연구센터장은 “노인과 장애인에게 부양의무를 적용하는 건 우리 사회 시민들의 도덕의식에 안 맞는다. 일단 이것부터 푸는 게 맞다”며 “한꺼번에 부양의무제를 없애는 게 어렵다면 일단 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부터 단계적으로 폐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성대 새정치민주연합 복지전문위원도 “노인 장애인 부양의무제 폐지는 최소한의 것”이라며 “이것부터 폐지하고 차분히 개선해나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소득인정액 기준을 완화하자는 게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교육급여의 경우 폐지여부를 검토 중”이라며 “인구 집단별 선별폐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