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20일 이틀간 설악산에 머물렀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도 대승령~귀때기 청봉~한계령3거리~끝청~중청에 이르는 서북능선 길은 탐방객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편이다. 그 덕분에 눈잣나무, 만주송이풀, 노랑만병초 등 북방계 식물을 비롯한 희귀식물들이 많이 깃들어 있다. 그렇지만 자주 가는 사람들은 이 곳의 귀한 식물들이 해가 갈수록 개체수도 줄고, 상태도 점차 나빠짐을 느낀다고 말한다.
19일 오전 10시. 한계령 휴게소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가파른 탐방로 옆으로 노란 꽃을 피운 금마타리, 연분홍빛을 띈 흰 꽃떨기를 인사하듯 90도 숙인 숙은노루오줌, 긴 줄기 윗부분에 작은 흰 꽃을 피운 산꿩의다리, 큰꼭두서니 등 여름 야생화가 보였다. 군데군데 멈춰서며 꽃이 이미 졌거나, 아직 피지 않은 초본의 이름을 대면서 올라가니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힘든 줄 모르고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했다. 도깨비부채, 요강나물, 터리풀, 송이풀…. 이번 숲길 탐방의 주요 관찰 대상은 북방계 희귀식물과 꽃개회나무, 정향나무 등 늦봄과 초여름의 꽃나무들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사무소의 정승준 팀장과 임우찬 주임이 동행했다.
꽃개회나무 터널…향기에 취하다
6월 중순의 숲길에는 나무 꽃이 귀하다. 철쭉도, 밤(나무)꽃도 지고, 자귀·회화나무 등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설악산에 북한의 국화인 함박꽃나무(산목련)가 두세 송이씩 널리 피어 있지만, 조금 높은 곳에는 꽃개회나무가 한창이다. 물푸레나무 수수꽃다리 속의 정향·꽃개회·털개회·개회나무 등은 높은 산의 볕이 잘 드는 개활지나 계곡 가에서 볼 수 있다. 꽃이 예쁘고 향기가 좋은데다 줄기와 껍질이 위장병, 기침가래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예전부터 방향제와 약재로 우리 민족과 오랫동안 교분을 맺어 왔다. ‘미스킴 라일락’이 한 미국인이 1940년대 말 북한산 백운대 근처에서 채집한 털개회나무 씨앗이 미국에서 품종 개량을 거쳐 원예종으로 상품화된 것이라는 사례는 유명하다.
삼거리에 도착하기 직전 돌계단 길에서 마주친 탐방객 일행이 꽃을 관찰하고 다니는 우리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북능선을 걷고 내려오는 길이라는 한국사진작가협회 강릉지부 김부오 기획간사는 올해 꽃개회나무의 꽃 ‘작황’이 지난해보다 영 못하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지난해 6월24일에는 서북능선 모처에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혹적인 향기에 취해 한 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에는 냉해 탓인지 꽃봉오리가 아예 안 맺힌 나무도 많았어요. 아찔한 향기가 그리워 올해 다시 찾았는데 꽃 핀 나무도 서너 다발씩 밖에 열리지 않아 너무 아쉽습니다.” 그와 동행인 탐방객은 “당시 천상의 화원에 다녀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계령 삼거리부터 중청대피소까지 걷는 동안 꽃개회나무 향기가 좋다. 과거의 좋은 기억은 증폭되게 마련인가 보다. 지난해 꽃향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지만, 올해도 꽃은 풍성하다. 등산로가 비교적 좁게 유지되고 있는 덕분에 걷는 동안 머리 위로도, 손만 뻗어도 바로 닿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분홍빛, 보랏빛 꽃송이에 코를 갖다댈 수 있었다. 어느 한 곳에서는 백당나무의 흰 꽃과 그를 둘러싼 중성화와 붉은 꽃개회나무 꽃송이들이 뒤섞여 사람 키 높이보다 약간 더 높은 꽃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정향나무는 드물었지만, 해발 1400m 부근의 개활지에 흰 꽃을 아직 떨구지 않은 개체도 하나 있었다.
정향나무 능선 개활지에서 개체수 감소…멸종의 길 접어들수도
설악산에서 정향나무는 꽃개회나무보다 더 낮은 곳에 서식하고, 개체 수도 더 많다. 그렇지만 정향나무는 백두대간과 경상북도 고지대에서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성종16년인 1485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 일정과 감회를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라는 필사본에 남겼다. 그가 금강산 관광을 마친 후 동해바다에 접한 길을 따라 강원도 양양까지 내려와 한계령을 넘을 때 그를 반겨준 것은 정향나무였다. “오색역을 출발해 소솔령(한계령)을 지나니 설악산의 봉우리가 무려 수십 개였다.… 정향나무 꽃을 꺾어 말안장에 꽂고 그 향기를 맡으며 갔다”고 그는 썼다.
500여 년 전 해발 1004m인 한계령 고개에는 남효온이 꽃을 꺾을 정도로 정향나무가 많았겠지만, 지금 44번 국도로 포장된 이 길가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중청대피소까지 가는 길에도 정향나무는 해발 1300m 이상 지역에서만 드물게 발견된다. 정승준 팀장은 “한계령을 넘는 44번 국도 주변을 조사해본 적은 없지만, (정향나무를) 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다음날인 20일 설악산 동쪽 사면인 천불동계곡을 내려갈 때 탐방로 주변에는 정 팀장의 말대로 정향나무가 비교적 키는 작은 편이지만, 상당수가 서식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위 틈에서 자란 한 개체는 덜 여문 종자를 품고 있었다.
정향나무류도 북방계 식물이라서 기온상승으로 인한 기후변화에 취약하다. 천불동 계곡에서 정향나무가 서식하는
양폭 대피소부터 비선대까지 해발고도는 대략 500~800m 정도로 서북능선은 물론 한계령 부근 고갯길보다 더 낮다. 계곡 옆이라서 평균기온이 개활지보다 더 낮다는 점도 요인일지 모른다. 실제로 백두대간과 정맥들을 따라 분포하는 정향나무는 소백산 주능선에서, 북한산 능선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다. 인위적 훼손보다는 기후변화, 그리고 늘어난 등산객의 답압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슷한 서식조건을 좋아하는 철쭉, 신갈나무 등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탓도 있을 것이다.
치솟는 여름기온, 쇠락하는 분비나무 군락
서북능선과 마등령 등에 분포하는 분비나무의 위기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계령삼거리에서 서쪽 귀때기청봉으로 올라가 보니 탐방로의 분비나무 군락지에는 고사목이 즐비하다. 지름이 40㎝가 넘는 고목도, 10㎝ 이하의 어린 나무도 죽은 개체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곳에는 잎이 연두색인 치수(어린 나무)가 거의 없어 군락이 머잖아 대가 끊기는 사태까지 우려된다. 공단에 따르면 고사목이 많은 곳은 최근 수년간 여름에 섭씨 31도까지 올라가고 28도 이상의 기온이 100시간 이상 지속되기 했다. 정 팀장은 “고지대의 분비나무는 암반 토양층이 얇아서 수분과 영양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서 고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청대피소를 2㎞가량 앞둔 지점부터 빗줄기가 강해졌다. 한계령 서쪽 대청봉 쪽으로는 사정이 좀 나아서 건강한 모습의 분비나무가 많이 눈에 띄고, 고사목은 많지 않다. 치수들도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건강한 듯 보이는 개체에서도 군데군데 잎이 붉게 변한 경우가 많았다. 공단의 용역을 받아 이 곳 북방계식물들을 모니터링하는 전영문 순천대 강사는 “올해 특히 분비나무 잎이 많이 변색됐다”면서 “기온 상승과 수분부족의 영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4년 전부터 기후변화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설악산 아고산대 식생분야에 대한 조사의 경우 분비나무, 눈측백, 눈잣나무에 대해 실시되고 있다.
이들 수종은 모두 기후변화에 의해 점차 산꼭대기로 쫒겨나고 있고, 따라서 기후변화 취약종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대로 두면 머지않아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다. 특히 희귀식물인 눈잣나무는 설악산 군락이 남방한계선이다. 공단의 지난해 모니터링 결과 두 수종은 모두 활력도가 70.2~72.8 범위 안에 머물러 생육이 불량한 것으로 판명됐다. 반면 오대산, 지리산 등 다른 산의 구상나무, 주목, 가문비나무 등은 활력도가 86 이상의 값을 나타냈다. 역시 이 곳 토양의 수분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희귀식물들, 서북능선의 품속에 숨다
중청대피소에서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대청봉으로 갔다. 정상 부근에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조금 아래는 사방이 여전히 구름에 덮여 있었다. 범꼬리, 고본, 털쥐손이, 등대시호, 솔나리, 큰앵초, 세잎종덩굴, 시닥나무, 생열귀나무 등이 보였다. 붉은병꽃나무는 빨간 꽃이 아직 지지 않았다. 특히 이곳 외에는 백두산에서나 볼 만주송이풀은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만주송이풀, 바람꽃, 난장이붓꽃, 장백제비꽃 등의 북방계 식물은 이곳이 남방한계선이다. 특히 노랑만병초와 홍월귤은 멸종위기종이다. 정승준 팀장은 “희귀식물의 위치를 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관리공단은 특히 눈잣나무에 공을 들이고 있다. 키가 최대 4~5m이고, 대개 1m 이하인 이곳의 눈잣나무는 열매가 영글어가면 잣까마귀와 다람쥐가 따 먹어버리기 때문에 번식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 동물은 물론 열매가 잘 익었을 때에는 씨앗을 퍼뜨리는 역할도 하지만, 채 영글기 전에 먹어버리는 게 문제다. 공단 직원들은 지난 26일 종자 채취용 보호망 500여개를 대청봉 근처 여러 곳에 걸쳐 일부 개체에 설치했다. 보존된 씨앗은 훼손지 복원장소에 뿌려진다. 정 팀장은 “눈잣나무 다수에 보호망을 씌우지 않은 것은 동물이 퍼뜨린 씨앗과 함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식물과 사람의 공존을 위한 느림의 산행문화
설악산 서북능선 만큼 귀한 꽃과 나무를 한꺼번에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남한 땅에 거의 없다. 역설적으로 그런 만큼 멸종으로 향하는 과정이 한 눈에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야생화 애호가들은 이곳을 ‘가슴이 설레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설악 녹색연합의 박그림 대표는 “이 곳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더욱이 양양군은 오색약수터에서부터 대청봉 1㎞아래의 관모능선까지 오색케이블카 설치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김진하 양양군수 당선자는 “케이블카를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말하는 실정이다. 유럽의 알프스산이나 미국, 일본의 높은 산들은 케이블카에 내려서도 전문장비 없이는 연계등반이 불가능하지만, 국내 산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고산지대 보호구역 면적에 비해 탐방객 숫자가 너무 많은데 케이블카로도 추가로 실어 나를 경우 탐방로 주변 훼손이 불가피하다.
지구상 어떤 생태계에서도 모든 종들은 다른 종의 생존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또 받는다. 생명체는 이런 상호연결의 망을 통해 비록 자신의 세대로는 수명을 다해 사라지더라도, 종으로는 영구적으로 살아간다. 자연질서가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어지간해서는 멸종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종이 사라진다는 것은 존속을 방해하는 요인이 오랫동안 지속됐거나 서식지 파괴로 이어지는 큰 충격이 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인간이 생태계의 질서에 분별없이 간섭하게 되면, 한 종의 씨가 모조리 마를 수도 있다.
정승준 팀장은 “정상만을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가는 산행보다 이렇게 동식물을 관찰하면서 천천히 걸으면 몸에 무리도 가지 않고, 즐거움도 배가된다”고 말했다. 기자 자신도 과거 십여 년 전 식물과 생태계에 관심이 없을 때 앞만 보고 정상을 향해 걸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동식물을 배려하며 가는 탐방길은 사람과 동식물 모두에게 좋다. 느림의 산행 문화는 멸종위기 동식물을 보호하는 작은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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