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Kimchi! Kimchi!”
대형마트로 들어 서는 사비나가 들 떠 보입니다. 스위스에 올 때 김치를 가져오라며 장난처럼 내뱉은 말이 현실이 될지 몰랐나 봅니다. 정말 배추까지 사온 것도 봤지만 김치가 어떻게 만들어 질지 궁금해 하는 눈치입니다. 오랜 자취 생활로 열악한 조건(?) 속에서 여러 요리를 해봤던 실력과 캐나다에서 약식 맛김치를 담았던 경험이 있어 자신 있게 도전한 건데…… 사실 파리 한인민박집에서 얻어온 고춧가루 말고는 여기서 재료를 다 구해야 했기 때문에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춧가루 외에도 무, 당근, 쪽파 말고도 찹쌀풀, 마늘, 생강 등 다양한 양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최대한 간소화 시켜 마늘, 생강, 파 정도를 구하기로 했습니다. 마늘, 생강은 전 세계에서 즐겨 먹는 향신료이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파는 ‘spring onion’이라고 해서 한국 파와 비슷한 것을 파는 곳도 종종 있으니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다행히 큰 마트라서인지 spring onion을 팔고 있었습니다.
이제 가장 큰 문제는 액젓. 액젓은 김치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양념입니다. 캐나다에선 한인마트가 많아서 새우젓이나 멸치액젓을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과연 여기에서 그 대체품을 구할 수 있을까요? 희망을 ‘남쁠라’에 걸어보기로 합니다. 남쁠라는 태국식 생선젓갈입니다. ‘Fish sauce’라고 적혀있는데 꽤 많은 나라에서 팔고 있는 제품입니다.
“수입식품 코너가 어디야? 동남아시아 식품 같은 거 있는 데” 사비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서 반신반의 하면서 안내합니다. 앗! 다행히 피쉬소스가 있습니다. 이제는 김치를 담는 일만 남았네요. 역시 스위스 물가답게 비싸긴 하지만 마늘과 생강도 사고 계산대로 향합니다.
“살 거 더 없어? 내일은 마트가 문을 안 여니까 오늘 다 사야 해.” 아니 일요일에 문을 닫는 마트라뇨.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비싼 물가 이야기와 취리히에서 비싼 버스비 때문에 놀랐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비나는 물가에 비례하는 월급을 받기 때문에 많이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일요일에 마트가 문을 닫는 건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니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쉬어야 하지 않냐고, 예전엔 토요일에도 문을 닫았었는데 그나마 토요일에 문을 열어주니 편해졌다고 대답했습니다.
비싼 물가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마트의 휴일도 생각해보면 ‘기준’의 차이입니다. 한국의 물가에 비해서는 비싸지만 스위스에서 받는 월급을 기준으로 한다면 합리적인 가격일 겁니다. 내가 일요일에 쇼핑을 하지 못하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일요일 하루라도 쉬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뜻한 햇빛을 쐴 때 내 그늘에 가려진 풀잎들은 빛을 쐬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시각으로만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작은 교훈을 이 여행을 통해서 또 하나 얻어갑니다.
현재 경찰관으로 일하고 있는 사비나는 집에서 독립해 고등학교 동창인 카린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아무리 월급을 넉넉히 받는 다고 해도 20대가 혼자서 월세를 감당하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거실 하나, 방 두 개가 딸려있는 집은 꽤 넉넉하고 아늑합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불편함 없이 잘 갖춰진 자취방입니다. 김치를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니 일단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고 채식주의자인 둘을 위해 배춧잎을 이용한 덮밥을 요리합니다. 둘은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흰밥을 곁들여 먹을 정도로 쌀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와인도 곁들여 조촐한 환영만찬을 듭니다.
식사가 끝나고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틀을 보내야 하는 카린이 불편해 하진 않을지 걱정했는데 사교적이고 활달하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친구였습니다. 카린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는데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 친구들과 잘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김치도 그때 많이 먹어봤다고 하더군요. 미국에 있을 때 보람이라는 힌국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준 카린을 위해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착한 성격에 예쁜 미소를 지닌 카린에게 착할 선(善), 기쁠 희(喜)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카린은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페이스북에 자신의 이름을 ‘Karin Sun Hee Hauser’ 라고 바꿔놓기도 했어요.
드디어 배추가 숨이 죽었네요. 이제는 본격적으로 김치를 담아 볼 시간입니다. 두 스위스 처자들은 마늘을 까는 일을 맡았습니다. 스위스에서도 마늘을 쓰지만 요리할 때 한 두 알 정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마늘 세 통을 까보긴 처음이라며 열심히 마늘을 깝니다. 생강을 갈고 마늘을 찧고 태국식 액젓을 섞어 양념을 만들고 꺼내 먹기 쉽게 배추를 한 잎 크기로 잘라 양념에 버무립니다. 그렇게 스위스에서 키운 배추로 한국식 김치가 유리병 두 개에 가득 담깁니다. 맛이 들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발효가 되고 거품이 보글 보글 올라오면 그제야 유산균이 가득한 건강한 김치가 만들어진다고 말해줍니다.
두 스위스 친구들은 다음날 아침을 전통 스위스 식으로 차려주겠노라 약속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함께 자국의 문화를 나누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관광객으로 충실히 보냈던 파리의 시간보다 단 이틀이지만 사비나와 카린과 함께 시간을 보낸 이 시간이 더 여행답게 느껴집니다. 여행이란 호텔에서 자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나를 내던져 나를 알아가는 것, 틀밖에 나오지 않으면 알 수 없던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행이 그렇게 좋은가 봅니다.
글·사진 | 이선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