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종이컵이 아니다’ 종이컵이지만 종이컵이 아닙니다. 스마트폰 보조배터리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보조배터리가 아닙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말하는 것일까요? 2018년 한국사회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종이컵, 보조배터리, 안경, 생수병, 담뱃갑, 볼펜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으로 위장된 몰래카메라(불법촬영) 범죄가 여성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4일 경기 여주시의 한 주민센터 공무원 A씨(32)를 성폭력범죄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A씨는 지난 3월부터 지난 6월까지 자신이 근무하는 주민센터 여자 화장실에 종이컵으로 위장한 카메라를 설치, 380여개의 동영상을 불법 촬영한 혐의를 받습니다. 같은 날, 국가정보자원관리원 광주센터의 조리사 김모(38)씨도 스마트폰 보조배터리 모양의 불법촬영 장비를 직원 탈의실에 설치해 여성 직원을 촬영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습니다.
불법촬영 범죄는 날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드론을 이용한 불법촬영 범죄가 등장해 논란이 됐죠. SNS의 등장으로 불법촬영물의 전파 또한 매우 빠릅니다. 경찰이 불법촬영에 대한 특별단속을 선언했지만 역부족입니다. 온라인에서는 ‘화장실 몰카’ ‘탈의실 몰카’ 등의 이름으로 무수한 일반인 여성의 신체가 ‘공유’되고 있습니다. 불법촬영 도구는 여전히 ‘클릭’ 한 번으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박경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카메라 등 이용촬영 범죄 현황’에 따르면 지난 2016년 불법촬영으로 인한 범죄는 5185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범죄 구속률은 2.8%에 불과했습니다.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불법촬영으로 기소된 809명 중 10.5%만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41.4%인 335명은 집행유예 또는 선고유예로 풀려났죠. 불법촬영 범죄물을 소비하는 이에 대한 처벌도 전무한 상황입니다.
여성들은 불법촬영 범죄로 인해 불안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웹하드 카르텔과 디지털성범죄 산업에 대한 특별 수사’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0만명 이상이 참여했습니다. 불법촬영 피해자의 영상이 웹하드 등에서 ‘수익’으로 취급되는 일에 분개한 것입니다. 불법촬영에 대한 우려에 자구책을 마련하는 여성들도 있습니다. 휴지와 실리콘을 들고 다니며 화장실 안에 뚫린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몰카탐지기’를 구입, 휴대하는 여성들도 생겨났습니다.
불법촬영 범죄에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불법촬영 범죄자에 대한 단호한 처벌과 근절 대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세상의 절반’ 여성의 목소리에 이제 답해야 할 때입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