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서로 자신의 자식이라 주장하는 두 여인. 이자 대신 1파운드의 살을 요구하는 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 끝나지 않던 갈등은 공정한 재판을 통해 결론이 났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품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던 채무자는 약혼자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 그리고 소설 속 이야기지만 재판은 억울한 일을 당한 약자에게 최후의 보루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일상에서도 종종 설전 끝에 “법대로 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법에 의해 보장됩니다. 범죄 의혹이 짙은 사람일지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사법농단’ 관련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며 지난 19일 보석(조건부 석방)을 신청했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헌법상 보장된 피고인의 방어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며 “불완전한 검토 자료를 바탕으로 방어권 행사를 할 경우 사안에 대한 심리가 모두 이뤄지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치소에 수감돼 재판받을 권리가 저해된다는 것입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지 26일만의 일입니다.
양 전 대법원장 보석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씁쓸함은 남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소송의 원고였던 고(故) 이상주씨는 지난 1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지난 1940년 17세의 나이로 일본 이와테현 가마이시 제철소에 끌려가 2년간 강제노역 했습니다. 고 이씨가 끝내 받지 못한 것은 일본의 사과뿐이 아니었습니다. 강제동원 소송의 확정 판결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법원의 빠른 판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이 제기된 후에는 규탄 시위에 참여했죠.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고 이씨의 항소심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더 이상 재판정에 서지 못하는 사법농단 피해자는 고 이씨뿐만이 아닙니다.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소송 원고 12명 중 고 이씨를 포함 11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다른 재판거래 대상으로 거론되는 쌍용차 노동자, KTX 승무원 중 일부도 눈을 감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법이 정말 누구에게나 공정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서 이 사건이 조명되길 바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달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며 이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바란 것은 사법농단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보석을 신청하기까지 구치소에서 보낸 26일간만이라도 그러한 간절함을 느꼈기를 바랍니다. 고 이씨가 판결을 기다리다 눈을 감은 2168일이라는 시간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고 이씨에게 다시 한 번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 pt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