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이란 이름의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식단은 된장찌개와 돼지고기 볶음이었다. 귀국하면 먹게 될 우리음식에 다시 적응하라는 배려였을까? 12시쯤 식사를 마치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바티칸시국으로 향했다.
바티칸 시국은 우리가 누비고(?) 다녔던 로마 유적이 흩어져 있는 도심의 서쪽 테베레 강 건너편에 있다. 라틴어로는 스타투스 키비타티스 바티카나이(Status Civitatis Vaticanæ), 이탈리아어로는 스타토 델라 치타 델 바티카노(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가 공식명칭인 바티칸 시국(Vatican 市國)은 로마 시내에 위치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국가이다. 테베레 강으로부터도 떨어져있어 물과는 아예 인연이 없는 내륙 국가이다.
바티칸 언덕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바티칸 평원을 포함해 0.44㎢의 면적에 인구 900명에도 미치지 않는 아주 작은 독립국가다. 면적만 따지면 서울에 있는 상계5동 정도의 크기지만,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지배하는 엄청난 힘을 가진 강소국이다. 756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허리를 넓게 차지하는 교황령을 지배한 적도 있지만, 19세기에 이탈리아왕국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강제 합병되어 소멸된 적도 있다. 1929년 교황령 회복을 논의한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현재 위치에서 독립하게 됐다.
‘바티칸’이란 이름은 기독교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에 이 지역에 있는 언덕에 붙여진 라틴어 이름,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티칸과 로마 사이에는 두터운 성벽이 서 있는데, 교황 레오 4세(Leo PP. IV, 재위: 847년~ 855년)가 테베레 강을 거슬러 쳐들어올지 모르는 사라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벽을 쌓고 44개의 망루를 세운 것에서 시작됐다. 바티칸 성벽은 16세기 들어 바오로 3세(Paulus PP. III), 비오 4세(Pius PP. IV), 우르바노 8세(Urbanus PP. VIII) 등이 성채를 새로 쌓아올리면서 바티칸의 면적이 더 넓어졌다.
고대 로마제국 시절 바티칸 언덕은 대지모신인 키벨레와 그녀의 아들이자 연인인 죽음과 부활의 신 아티스를 숭배하던 장소였다. 키벨레와 아티스는 지금의 터키에 있던 프리기아의 신들이었는데,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들어왔다. 그리스신화의 키벨레는 로마신화의 마그나 마테르(Magna Mater)에 해당한다.
서기 1세기 초에 로마황제 대 아그리피나(BC 14년 - AD 33년)는 바티칸 언덕과 그 주변에 물을 대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개인 정원을 건립했다. 뒤를 이은 로마 황제 칼리굴라(37년 - 41년)는 이곳에 거대한 원형경기장(Circus Gaii et Neronis)을 만들었다. 지금의 성 베드로 광장 중앙에 서있는 오벨리스크는 서기 37년에 칼리굴라황제가 이집트의 헬리오 폴리스에서 가져와 원형경기장을 장식한 것이다.
서기 64년 네로황제 시절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 사건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티칸 언덕에서 순교하게 됐다. 베드로 성인 역시 순교자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전한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졌고, 5세기 초에는 대성전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바티칸 언덕은 기독교의 중심이 돼갔다.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 언덕에는 각종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과 무덤, 비문 등이 세워져 있었다.
바티칸 미술관 부근의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갔다. 버스에서 볼 때도 엄청 높아보였던 바티칸 성벽을 따라 걷다보니 그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압박감이 절로 생긴다. 한참을 가다보니 성벽이 다소 낮아지면서 미술관 입구로 사용되는 출입구가 나타난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는데, 미술관 출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 좁지도 않은 로비가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현지가이드가 미리 입장권을 구매해둔 덕에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 바로 입장했다. 교황의 목숨을 노리는 일이 작은 탓인지 검색이 엄정하다. 수신기까지도 녹색의 별도 수신기를 제공하는데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아서 가이드의 설명을 거의 듣지 못했다.
바티칸 박물관 (Musei Vaticani)은 수세기에 걸쳐 교황들이 모은 세계 최대 규모의 로마 조각품과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약 7만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2만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16세기 무렵 산타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 인근의 포도밭에서 훗날 ‘라오콘(Laocoön)과 그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대리석 조각상이 발견됐다. 당시 교황 율리우스2세가 이를 구입해 대중에 공개한 것이 바티칸 박물관의 시작이라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을 포함하여 모두 54개의 갤러리가 있다.
2m 조금 넘는 크기의 이 조각품은 라오콘과 그의 아들 안티판테스(Antiphantes) 그리고 팀브라에우스(Thymbraeus)가 바다뱀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서양미술에서는 ‘인간 고뇌의 전형적 아이콘’으로 지목돼왔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의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나오지 않지만 트로이전쟁에 관한 그리스 서사시에 등장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Aeneid)’에서 포세이돈 신전의 사제 라오콘이 창을 사용해 트로이 목마의 계략을 폭로하려다가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뱀의 공격을 받아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피나코테카(Pinacoteca vaticana)라고 하는 바티칸 미술관은 따로 보지 못했다. 무려 16개나 되는 방에 니콜로와 조반니, 조토, 라파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카라바죠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조각박물관부터 구경했다. 그런데 조각박물관도 소장품에 따라서 나뉘는 모양이다.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Museo Pio-Clementino)은 클레멘트14세가 설립을 시작했고 피우스 6세가 완성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조각 작품들을 주제에 따라서 그리스 십자가 갤러리(Sala a Croce Greca), 둥근 방(Sala Rotonda), 조각상 갤러리(Galleria delle Statue), 흉상의 갤러리(Galleria dei Busti), 가면 방(Gabinetto delle Maschere), 여신의 방(Sala delle Muse), 동물의 방(Sala degli Animali) 등이 이어진다.
천정화를 보기 위해 시스티나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지도 갤러리(Galleria delle carte geografiche)를 지나게 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13세의 명에 따라 지리학자인 이그나지오 단티(Ignazio Danti)가 1580년부터 3년에 걸쳐 120m 길이의 갤러리에 40개 패널을 완성한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해 대표적인 지역을 커다란 패널에 프레스코화로 그렸는데, 지리를 비롯해 가장 눈에 띄는 도시의 전망을 그려 넣었다. 여기 묘사된 지도는 대략적으로 80%는 정확하다고 한다. 아치형으로 된 천정에는 케사레 네비아(Cesare Nebbia)와 지롤라모 무지아노(Girolamo Muziano) 등 매너주의 미술가들이 참여해 그린 것이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인간의 기억의 한계를 절감했다. 바티칸에서 제공하는 수신기가 불량품인 탓에 현지 가이드의 설명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눈길이 가는대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작품들을 감상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고 사진을 찍은 것도 어떤 작품인지 확인이 어려웠다. 그리고 워낙 관람객이 많아 그들이 움직이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저 떠밀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눈길조차 주지 못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