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인 지난 1919년 3월 1일. 이날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이 담긴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이들은 인사동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후 독립선언서는 탑골공원에서 낭독됐고 3·1 운동을 촉발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기미독립선언서는 누가 썼을까. 지금까진 손병희가 대원칙을 잡고,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한용운이 마지막 부분 '공약 3장'을 추가해 최종 완성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공약 3장’의 문장이 본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호하고 느낌이라 다른 사람이 썼을 것으로 추측됐다.
하지만 박찬승 한양대양교 사학과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박 교수는 최근 발간한 저서 ‘1919’에서 독립선언서의 서술 과정을 추적했다. 경찰과 법정 심문기록 등 다섯 가지 자료를 꼼꼼히 살펴봤다. 박 교수는 “최남선의 진술을 보면 최린과 여러 차례 만나서 상의했다. 손병희의 말을 들은 최린이 이런 방향을 써 달라고 최남선에게 부탁해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여러 차례 만나 수정작업을 진행하려 했으나 “손볼 게 하나도 없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결국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쓴 초안에서 한 글자도 수정되지 않았다. 박 교수는 “한용운이 최린을 여러 차례 만나며 내가 써보면 어떻겠냐 의견을 말했다”며 “하지만 최린은 최남선에게 이미 맡겼다, 맡겨두자고 했고 한용운이 이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고 덧붙였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0년 간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박찬승 교수가 1919년을 다룬 책 ‘1919’를 발간했다. 박 교수는 1919년 일어난 일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한용운의 사례처럼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동안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쏟아졌지만, 단편적인 사례와 인물들을 다뤘을 뿐 전체를 조망하고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지 못했다.
9일 오전 11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1919’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박 교수는 “3·1운동의 준비와 전개 과정,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 대해 해석은 접어두고 실증적으로 정리하고자 노력했다”며 “실증적 정리가 되어야 해석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집필 방향을 설명했다.
‘1919’에는 지금까지의 정설을 뒤집는 다양한 사례가 담겨있다.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돼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인 ‘신문관판 독립선언서’가 1919년이 아닌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 4월 13일로 알려진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4월 11로 정정된 사연, ‘대한 독립 만세’가 당시 베스트셀러의 문구였다는 사실 등 저자가 새롭게 연구해 밝혀낸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당시 유관순의 활약과 3·1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이 많았다는 사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하나로 뭉치게 된 과정도 다뤘다.
3·1운동의 의미도 되짚었다. 박 교수는 3·1운동에 대해 “한국인들이 하나로 뭉쳤던 사건”이라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어 안타깝게 생각했다. 지난해 연구년이라 시간이 나서 정리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박 교수는 ‘1919’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쉽고 재미있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섞어가면서 쓰려고 노력했다”며 “가능하면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 20세기 한국사 가운데 가장 빛나는 시간이 1919년이기 때문”이라고 당부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