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레드벨벳 멤버 웬디가 25일 SBS ‘가요대전’ 리허설을 하다가 2m가 넘는 무대에서 떨어져 얼굴 부위 부상 및 오른쪽 골반과 손목 골절 등 중상을 당했다. 그보다 앞선 지난 16일엔 그룹 이달의 소녀 멤버 츄가 MBC ‘아이돌 육상 선수권 대회’를 녹화하던 중 남성 스태프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만 15세인 그룹 버스터즈 멤버 채연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EBS 프로그램 ‘톡! 톡! 보니하니’(이하 보니하니)를 진행하며 30대 남성들에게 위협과 모욕을 당했다.
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방송사들은 그러나 “안타까운 사고”(SBS), “제작진의 부주의”(MBC), “심한 장난”(EBS)이라는 말로 사태를 축소했다. SBS ‘가요대전’ 제작진은 “레드벨벳이 생방송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돼 팬 여러분 및 시청자 분들께 사과드린다”고 했지만, 정작 사고 경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 사이 온라인에서는 사고가 발생한 리프트 무대가 전날 리허설부터 말썽이었다는 목격담들이 올라왔다. 현장 스태프들 간의 소통 오류로 사고가 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SBS는 “안전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가 빠졌다는 것이다. SBS는 향후 안전 관리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여기엔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바로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경위로 사고가 났는지 밝혀내야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SBS는 바로 이 과정을 건너뛰었다. “안전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SBS의 약속이 시청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앞서 ‘아육대’ 스태프의 머리채 사건과 ‘보니하니’ 출연자들의 폭력 사태로 물의를 빚은 MBC와 EBS의 사과문 역시 놀랄 만큼 SBS의 사례와 비슷하다. MBC는 ‘아육대’ 녹화 도중 한 남성 스태프가 이달의 소녀 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장면이 포착되자, “제작진의 부주의로 많은 분들께 불쾌감과 심려를 끼쳤다”면서 “이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선 SBS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제작진이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MBC가 이 사건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다. ‘아육대’ 제작진은 스태프의 행동을 두고 “무례”내지는 “제작진의 부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남성 스태프와 여성 출연자 간의 힘의 비대칭성을 고려하면 이번 사건은 ‘무례’가 아닌 ‘폭력’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또한 촬영 당시 주변에 있던 누구도 스태프를 말리거나 나무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송사의 관리·감독 문제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MBC의 사과문에는 이에 대한 자성이 빠졌다. ‘어떤’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물음표만 남는다.
EBS는 ‘보니하니’의 MC 채연이 ‘당당맨’ 역할의 개그맨 최영수에게 폭행당했다는 의혹이 나왔을 당시 최악의 초기 대응을 보였다. 당시 ‘보니하니’ 제작진이 내놓은 입장문은 이랬다. “논란은 사실이 아닙니다. 더 이상의 추측과 오해는 자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론이 악화되자 EBS는 다시 “허물없이 지내다보니 이어진 심한 장난”이라고 해명하며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난’이라는 해명은 물리적인 힘이나 나이, 연예계에서의 권력 등이 모두 우세한 쪽에서나 성립 가능한 것으로, EBS는 이런 사과문을 냄으로써 그간 자신들이 폭력과 위력에 얼마나 무감해왔는지를 드러낸 꼴이 됐다. 이후 ‘먹니’ 역의 개그맨 박동근이 유흥업소 은어를 사용하며 채연에게 욕설한 일, 게임 벌칙으로 사전 논의 없이 채연의 얼굴에 물을 뿌린 일 등이 도마 위에 오른 뒤에야 EBS는 두 개그맨의 하차, 제작진 교체, 책임자 경질 등의 조치를 취했다.
어쩌면 이런 엉망진창 사과문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술한 세 방송사는 사건·사고의 징후가 사전에 여러 번 감지됐는데도 잘못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위기관리 능력의 부실함을 더욱 드러냈다. ‘가요대전’의 리프트 무대는 웬디 사고 이전에도 다른 가수들에 의해 여러 번 위험성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아육대’는 출연자와 방청객에 대한 ‘갑질’로 이미 악명 높다. ‘보니하니’의 경우, 이번 논란이 점화되기 여러 달 전부터 위협적·가학적인 벌칙 행위에 대한 항의를 받았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공연계 ‘빨리빨리’ 문화가 낳은 안전불감증, 약자를 향한 폭력에 무감한 방송계 전반의 문제가 있다.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가 중요한 건, 그래야만 잘못의 근원을 추적하고 뽑아낼 수 있어서다. 부디 “재발 방지에 힘쓰겠다”는 약속이 허황되지 않길 바란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