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문대찬 기자 =리그 오브 레전드(롤) 게임단 T1의 ‘페이커’ 이상혁(23)은 e스포츠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혹자는 그를 'e스포츠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초’, ‘최다’, ‘최고’ 등의 수식어가 어울리는 그가 데뷔한 지도 어느덧 7년이 지났다.
그는 그간 '롤 챔피언스 코리아(LCK)' 8차례 우승을 비롯해 '롤 월드챔피언십(롤드컵)' 3회 우승, MSI 2회, 리프트 라이벌즈 1회 우승 등을 달성하며 누구보다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프로게이머 평균 수명이 2~3년에 불과하지만 이상혁은 여전히 최정상급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스프링 시즌만 해도 1라운드에서 플레이 오브 더 게임(POG) 포인트 500점으로 전체 4위를 달리고 있으며 소속팀 T1은 젠지 e스포츠에 이어 순위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올라있다.
이상혁은 지난 5일엔 LCK 최초 2000킬이라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종로 롤파크에서 열린 아프리카 프릭스와의 LCK경기에서 13킬을 추가하며 2000킬 고지에 올랐다. 현역 선수 기준으로 2위를 기록 중인 ‘쿠로’ 이서행(1433킬)과는 격차가 크다.
쿠키뉴스는 이상혁의 2000킬을 기념해 그가 걸어온 길을 재조명해보기로 했다.
▲ 2013년 : LCK를 제패한 ‘고전파’
2013년 4월 6일은 18살 이상혁이 데뷔전을 치른 날이었다. 아마추어 당시 ‘고전파’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그는 당시 국내 최정상 미드라이너였던 ‘앰비션’ 강찬용을 상대로 솔로킬을 따내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류’ 류상욱과의 맞대결에서 ‘제드’를 플레이 해 롤 e스포츠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명장면을 만들어낸 것도 데뷔해인 2013년이었다.
이상혁은 SK 텔레콤 T1(현 T1)과 함께 LCK 서머에서 우승을 거뒀고, 롤드컵에서도 ‘우지’ 지안즈하오가 버티는 로얄 클럽(현 RNG)을 꺾고 LCK에게 첫 롤드컵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 2014년 : ‘페이커’의 첫 번째 암흑기
이상혁의 7년은 영광적인 순간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2014년이 그랬다. 시작은 좋았다. LCK 윈터에서 전승 우승하며 기분 좋게 2014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엔 쉽지 않았다. 리그 선수들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오른데다가 팀원들 간의 호흡에도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혁의 캐리력이 전년도만 못했다.
특히 롤드컵 선발전 1경기인 삼성 화이트전에서 3세트 연속 퍼스트 블러드(선취점)를 내주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롤드컵 무대에도 서지 못했다.
▲ 2015년 : ‘마린’, ‘이지훈’ 든든한 동료를 얻다
2015년은 LCK 선수들의 엑소더스가 일어난 해였다. 삼성 선수들을 비롯한 리그 정상급 선수들이 해외 리그 진출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상혁은 거액의 제안을 뿌리치고 SKT 잔류를 선택했다. 이즈음 SKT는 K팀과 S팀을 통합하는데 그러면서 ‘마린’ 장경환과 ‘뱅’ 배준식, ‘울프’ 이재완이 이상혁과 새로이 호흡을 맞추게 됐다. ‘Easyhoon’ 이지훈은 서브 미드라이너로서 이상혁의 뒤를 받쳤다. 이상혁은 이들과 함께 LCK 스프링과 서머를 석권했고, 다시 찾은 롤드컵 무대에서도 쿠 타이거즈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 2016년 : 롤드컵서 세 번째 정상에 오르다
이상혁은 2016년 또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2015시즌 전성기를 함께 한 장경환, 이지훈이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LCK 스프링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7월 MVP전에서는 ‘비욘드’ 김규석을 잡고 리그 최초로 1000킬을 달성했다. MSI에서도 우승하며 2015시즌의 아쉬움을 털어냈다. 어김없이 찾은 롤드컵 무대에서는 해외 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자신의 롤드컵 세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 2017년 : 하드캐리, 그리고 눈물
2016시즌 롤드컵 우승을 합작한 ‘듀크’ 이호성이 떠났지만 2017시즌에도 이상혁의 활약은 계속됐다. 스프링 시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서머에선 준우승을 거뒀다. MSI에서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롤드컵 무대는 험난했다.
당시는 원거리 딜러의 캐리력이 중요한 ‘향로 메타’였다. 하지만 배준식의 기량이 이전과 같지 않은 탓에 T1은 매번 힘든 경기를 펼쳤다. 이상혁은 위기의 순간마다 슈퍼 플레이를 펼치며 팀을 계속해서 상위 라운드로 이끌었다. 특히 4강에선 강력한 우승 후보 RNG를 상대로 다섯 번 연속 ‘갈리오’를 플레이 해 3대 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당시 마스핏츠의 원거리 딜러 한스 사마는 자신의 SNS에 “SKT를 이길 순 있지만 페이커를 이길 순 없다”며 이상혁의 플레이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결승 무대 내용은 다소 허무했다. SKT는 삼성 갤럭시를 맞아 세 경기를 모두 내주며 우승 도전이 좌절됐다.
경기 종료 뒤 이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눈물을 쏟았다. 그간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이상혁이었기에 수많은 팬들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당시 중국 포털 사이트에는 ‘페이커 눈물’이라는 검색어가 한동안 순위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 2018년 : ‘페이커’를 의심하다
2018년은 이상혁의 두 번째 암흑기였다. 팀원들의 극심한 기량 저하도 문제였지만 이상혁 또한 치명적인 실수들을 연달아 범하며 팀을 무너트렸다. 특히 귀환 과정에서 허무하게 전사하는 모습을 수차례 보이며 팬들의 매서운 비판을 받았다. 이상혁의 부진과 함께 SKT는 스프링 시즌 4위, 서머에서 7위를 기록하며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이상혁은 시즌 중간 한국 국가대표로 뽑혀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따내기도 했으나, ‘페이커의 시대가 끝났다’는 혹평이 잇따른 시즌이었다.
▲ 2019년 : I'm Back… 그러나 G2와의 악연
의뭉스런 시선을 벗어 던지고 이상혁은 2019시즌 화려하게 부활했다. 새로이 합류한 ‘칸’ 김동하, ‘클리드’ 김태민, ‘테디’ 박진성과 함께 다시 한 번 LCK를 제패했다.
이전보다 피지컬이 다소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긴 했으나 경기를 보는 눈, 뛰어난 플레이 메이킹 능력으로 LCK 스프링, 서머 시즌을 모두 석권했다. 리프트 라이벌즈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이상혁은 롤 e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라이엇 게임즈가 주관한 롤드컵, MSI, 올스타전, 리프트 라이벌즈 등 4개의 국제대회를 모두 우승한 선수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다시 찾은 롤드컵 무대에서도 이상혁의 활약은 계속됐다. RNG와 프나틱, 클러치 게이밍과 함께 죽음의 조에 속했으나 매 경기 맹활약하며 팀을 조 1위로 8강에 이끌었다.
개막전이었던 프나틱과의 경기에서 ‘트리스타나’를 플레이 해 경기를 주름잡은 이상혁은 승리 인터뷰에서 “I'm Back(내가 돌아왔다)”이라 말하며 ‘왕의 귀환’을 알렸다. 경기를 지켜 본 현지 해설진도 “신이 돌아왔다”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밖에 이상혁은 RNG와의 경기에서도 ‘트위스트 페이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해내며 극찬을 받았다. 불리한 전황을 단숨에 뒤집은 그의 결단력에 세계가 놀랐다.
스플라이스를 꺾고 4강에 올랐지만, 이상혁과 SKT의 도전은 거기까지였다. 8강전부터 컨디션 난조를 보이던 이상혁은 G2 e스포츠와의 4강에서 아쉬운 활약을 펼치며 무릎을 꿇었다.
앞선 MSI 준결승전에서 G2를 맞아 패했던 이상혁은 롤드컵에서도 G2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페이커는 페이커’라는 것을 다시금 보여준 시즌이었기에 의미가 적지 않았다.
▲ 2020년 : 드림팀이 아니지만 괜찮아
T1은 2020시즌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이상혁과 7년간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해 온 ‘꼬마’ 김정균 감독이 팀을 떠났고 ‘드림팀’의 주축이었던 김동하와 김태민이 이적을 선택했다. 자연스레 이상혁의 활약이 올해에도 이어질 수 있을지 우려하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이상혁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었다.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아프리카 프릭스에게 패하며 선두 자리를 내줬지만 유력한 우승 후보인 젠지e스포츠, 드래곤X를 상대로 모두 승리하는 등 시즌 전망을 밝혔다.
더불어 그는 T1과 2022년까지 재계약을 체결했다. 사실상 종신 계약이다. 그가 남은 선수 생활, T1과 함께 어떤 역사를 써내려갈지 관심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