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방송국 놈들’이란 표현이 있다. 이는 어떻게든 출연자들을 자극하고 막다른 상황에 몰아넣어 방송 분량을 뽑아내고야 마는 한국 리얼리티 예능의 현실을 축약한다. Mnet은 ‘방송국 놈들’의 대표 주자다. 그동안 많은 비판이 있었다. Mnet ‘쇼미더머니’로 한국 힙합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언프리티 랩스타’로 여성 래퍼들에게 굳이 독기를 품게 만들고 그들의 다툼을 전시했다. 한국 오디션 예능의 유행을 선도하며 음악 전문 방송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지만, ‘프로듀스 101’ 시리즈와 ‘아이돌학교’의 조작 사건으로 방송국의 신뢰도를 바닥까지 추락시켰다. 어느 새 Mnet 음악 예능은 출연자와 Mnet과의 경쟁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Mnet은 스스로가 빌런(villain, 악당)임을 받아들였다. 지난달 14일 방송을 시작한 Mnet ‘굿 걸’의 부제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마치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한 장면처럼 오프닝을 연 ‘굿 걸’은 국내 여성 힙합 R&B 음악인들이 방송국을 털기 위해 한 팀으로 뭉쳤다는 콘셉트로 진행된다. 열 명의 ‘굿 걸’이 방송국이 제안하는 미션에서 이기면 1000만원의 플렉스(Flex) 머니를 획득한다는 설정이다. ‘굿 걸’ 1회에서 출연자들은 모두 Mnet을 털어 돈을 버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 있냐는 식으로 쿨한 출연 계기를 남긴다. ‘언프리티 랩스타 3’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여성 래퍼 예능은 경쟁에서 연대로 콘셉트를 바꿨고,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감을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2020년에 어울리는 새로운 판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새로운 판에서 새로운 재미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서로를 물고 뜯는 경쟁 구도를 만들어내는 데 중독된 옛날식 방송의 틀 안에서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여성 음악인들의 다채롭고 흥미로운 개성과 각자의 서사다. 초반부엔 방송 환경과 Mnet식 경쟁 구도를 낯설어하는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이 프로그램에 녹아드는 과정을 그렸다. 마치 슬릭이 따돌림을 당하고 다른 멤버와 갈등을 겪는 듯 표현된 예고편의 ‘악마의 편집’을 걷어내면, 조금 다른 음악을 할 것 같고 고집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편견이었음을 깨닫고 오히려 더 호감을 갖는 서사가 펼쳐진다. 방송은 마치 슬릭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춤과 퍼포먼스를 연습했다는 식의 노력 스토리에 집중했지만, 시청자들은 사실 슬릭이 처음부터 열려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멤버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슬릭은 시작에 불과하다. ‘굿 걸’은 출연진을 자꾸만 평면적인 캐릭터에 가두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현재를 인정하면서도 더 발전하려는 의욕이 가득한 그룹 CLC 예은을 기존 아이돌의 프레임에 가둬놓고 상대적으로 미숙한 멤버인 것 그리는 시선이 대표적이다. SNS를 통해 거침없는 매력을 끊임없이 발산하는 이영지에겐 자신감 없지만 실력 있는 막내 캐릭터 이상의 역할을 주지 않는다. 효연 역시 경력이 많은 언니 캐릭터로 소모할 뿐, 매번 놀랄 정도로 안정되고 완성도 높은 무대와 퍼포먼스를 만들어내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가장 적은 분량으로 스쳐가는 전지우와 제이미는 아직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연습생들의 분량 조절 문제로 논란에 시달린 ‘프로듀스 101’과 같은 난관에 처한 것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더 정확히는 새로운 판을 만드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더 앞으로 나아갈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모양새다.
경쟁을 위한 연대로 흐르는 관습적 편집은 더 큰 문제다. 처음 미션에서 서로를 파악한다는 의미의 ‘크루탐색전’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서막이었다. Mnet 예능에 출연해왔던 가수, 래퍼, 아이돌을 잔뜩 불러놓고 멤버들의 무대를 평가하게 하고, 멤버들끼리도 서로 평가해 그 결과를 알려주는 방식이 어떤 의도로 기획된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상대와의 경쟁을 위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송 캠프를 진행하며 다시 내부의 경쟁을 유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스트뮤직-위더플럭과 대결하는 첫 미션에서 승리한 후 확보한 플렉스 머니를 멤버 한 사람에게 몰아줘야 한다는 규칙이 공개되는 순간엔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만다. “제가 아무리 제일 큰 득표차로 이겼다고 하더라고 결국엔 모두가 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어쩌라고요”라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영지의 발언을 ‘굿 걸’은 단순히 재미있는 돌발 행동 정도로 다룬다.
‘굿 걸’이 보여준 가능성과 한계는 명확하다. 랩의 완성도와 실수 여부로 승패를 결정짓는 대결 구도 대신 누가 더 각자의 개성을 잘 보여주고 매력적인 무대를 완성하는지 여부를 중시하는 것으로 기준점이 바뀌었다. 여성 음악인들이 독기를 품지 않고 극한의 상황에 처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 예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서로의 시너지 효과와 신선한 조화가 상상해보지 못한 음악과 무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Mnet ‘퀸덤’이 보여줬던 여성 연대와 착한 서사로서의 매력을 무기로 프로그램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체적으로 성장해내는 지점까진 가지 못했다. 열 명의 음악인들은 서로의 경쟁력과 무기를 확인했지만, ‘굿 걸’은 자꾸만 새로운 시도보다 당장의 미션을 이기는 데 집중하게 만든다. 가장 큰 명분이었던 플렉스 머니에 대한 흥미는 점점 떨어지고,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 조명 받는다.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영양가 없는 승리가 잠깐 동안 손에 남았다가 사라진다. 방송국을 털기엔 ‘방송국 놈들’의 문턱이 아직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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