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인세현 기자=배우 이주영은 영화 ‘야구소녀’에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주인공 주수인을 연기한다. 주수인은 남자뿐인 고교 야구단의 유일한 여성선수다. 프로구단에서 뛰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실력을 정당하게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주변에서 “그 길은 아니”라는 성화가 쏟아지지만, 수인은 그저 던지고 또 던진다. “주수인은 결국 주변이 자신을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그런 부분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죠.” 최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이주영의 말이다.
‘메기’ ‘꿈의 제인’ 등 독립영화를 통해 주목받았던 이주영은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이태원클래쓰’에서 트랜스젠더 마현이 역을 맡아 널리 얼굴을 알렸다. 배우로서 중요한 시점에서 그가 ‘야구소녀’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영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여성서사이며 현실의 벽을 깨는 이야기인 동시에, 더 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영화라는 점도 이주영의 눈길을 끌었다.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제가 여태껏 해온 작품과 또 다른 결이라서 관심이 갔어요. 큰 규모의 상업영화는 아니지만 다루는 메시지가 대중적인 공감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모르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영화라서 더 흥미롭기도 했어요. 드라마를 마치고 집중력 있게 한 캐릭터에 빠지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 부합하는 작품이기도 했죠.”
영화에서 이주영은 주수인 자체다. 그는 혼란스러운 주변의 소음을 딛고 묵묵하게 새로운 길을 만드는 주수인을 섬세한 표현으로 단단하게 완성했다. 이주영은 수인과 얼마나 닮았느냐는 질문에 “수인이 느끼는 감정이나 처지에 공감했다”면서도 “수인이 작은 히어로처럼 느껴져 점점 대단하게 보였다”고 말했다. “수인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그처럼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특히 공을 들인 것은 주수인을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그리는 것이다. 수인이 겪는 갈등도 타자의 방해에서 비롯된 것보다 자신과의 싸움으로 보이길 바랐다. 화를 내거나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을 연기할 때도 속으로 끓는 것처럼 차분하게 표현한 이유다.
야구선수로서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분투하는 주수인의 모습에서 배우로 사는 자신의 삶을 엿보기도 했다. 이주영은 “이 일을 하면서 매 순간 정점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며 “내가 어느 위치에 있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늘 존재한다”고 털어놨다.
“일을 하면서 물리적인 보상을 얻을 때보다, 내면이 한 단계 성장했을 때 더 보상받는 느낌이에요. 연기를 오래 한 선배 배우들도 하나같이 ‘정점이 아니’라는 고민을 하더라고요. 연기자는 다음에 어떤 역할을 만날지 알 수 없어요. (연기에 대한) 만족은 어렵고 타인과 비교하긴 쉽죠. 이런 걸 인정하지 않으면 너무 힘들다는 걸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치열하게 고민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이주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다. 수인처럼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주영은 “신념이라고 말하긴 거창하다”면서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을 내놨다.
“저는 굉장히 즉흥적이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지금처럼 연기가 즐겁고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는 게 재미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나를 희생한다거나 소진한다는 생각이 커지면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연기를 붙잡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이걸 신념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더 좋은 양질의 감정을 느낄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어요.”
inout@kukinews.com / 사진=목요일아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