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직공장 여공·사시합격·인권변호사·국회의원 당선
- 입양한 딸과 조카 둘 키우는 '싱글맘'
- '일·가정 양립을 위한 육아휴직 현실화를 위한 법안'을 대표 발의
[쿠키뉴스] 박효상 기자 = 쉼 없이 달려왔다. 삶의 전부였던 어머니를 여의고 일찌감치 고아가 된 소녀. 가난 때문에 17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방직공장에서 밤새 실타래를 돌렸고, 식당에서 일했다. 살기 급급했던 20대를 지나 스물아홉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고, 야간대학 다니며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가난한 청소년·여성 등의 변호를 포함해 국선변호만 762건을 맡았다.
결혼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입양한 딸과 조카 둘을 키우는 엄마가 돼 있고 국회의원에 당선돼 '인생역전'의 아이콘이 됐다. 김미애(51·金美愛) 미래통합당 의원(부산 해운대을)의 인생은 그렇게 쉼표 없이 흘러왔다.
역경을 이겨낸 인생 스토리로 총선 출마 당시부터 주목받은 김 의원을 그의 여의도 의원실에서 만났다.
서먹한 분위기, 첫 만남은 늘 그렇다. 김 의원과의 인터뷰 역시 어색한 대화로 시작했고, 걱정이 스멀스멀 일었다. 의미 있는 이야기가 오가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데, 이러다가 형식적인 질문과 답변만 주고받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였다. 다행히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고, 자녀 이야기가 나오자 김 의원은 무장해제 됐다. 피곤함에 젖은 표정은 사라지고 ‘엄마 미소’로 수다스러운 아줌마 모드에 돌입한 것이다.
“제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세 아이를 제 자식들로 키웠다는 거예요. 매일 붙어 있다가 이제는 주말가족이 되었는데 아이들이 수시로 사랑한다며 메시지로 하트를 수십 개 날려줘요. 그러면 모든 피로가 사라져요”
김 의원은 아이 셋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첫째는 작은 언니의 아들(20세). 2011년 언니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할 무렵 조카의 미성년후견인이 돼 집으로 데려왔다. 둘째(14세)는 큰 언니의 딸이었다. 2008년 12월 큰 언니가 남편의 사망 등으로 우울증에 걸리자 19개월이던 언니의 딸을 데려와 키웠다. 그리고 셋째(10세)는 2011년 입양해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다. 세 아이 모두 배 아파 낳지 않았지만, 친자식 이상으로 김 의원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원동력이다.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김 의원의 어린 시절 때문이다. 김 의원이 초등학생일 때 어머니는 암 선고를 받았고, 중학생이 됐을 무렵 어머니를 잃었다. 홀로 시골집에 남아 외로움에 사무쳐 눈물 흘렸던 날도 많았다. 그렇다고 김 의원은 부모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세 아이에게는 그 외로웠던 시간을, 사무치는 마음을, 밤마다 흘렸던 눈물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김 의원은 목표가 뚜렷하다. 국회에 들어온 이상, 저출산과 육아에 대한 문제를 개선하고자 한다. 초선 의원임에도 미래통합당 저출생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유는 동네 이모집 활성화, 초등학교 전일보육제 등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다양한 대책을 구상 중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에는 '일·가정 양립을 위한 육아휴직 현실화를 위한 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고, 아이들에게 '희망의 사다리'가 되고 싶어요" 김 의원의 육아는 국회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국회 입성 두 달이 지났다. 어떻게 보냈는가?
▶정말 바쁘게 지냈어요.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을 반복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토론회와 세미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초선이지만 당 최고의원인 비대위원을 맡아서 더 바쁘게 지냈죠. 자녀들과는 주말 가족이 되어 미안한 마음을 많이 갖고 있어요. 아이들과 수시로 통화하며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해요.
-당선 후 자녀들에게 받은 응원의 메시지가 있다면?
▶사실은 불평의 소리가 더 많아요. 지금도 국회의원 하지 말라고 하죠. 늘 엄마와 함께 자고 싶고, 엄마와 손잡고 등교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수 없잖아요. 항상 함께 지냈던 변호사 시절이 좋다고 얘기해요. 그렇지만 아이들이 제 생각도 많이 해줘요. 엄마가 모든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아이들이 든든한 응원군이에요. 수시로 '엄마 힘내, 사랑해, 하트' 등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줘요. 그 순간 모든 피로가 사라져요.(웃음)
-고등학교 중퇴 후 방직공장 근로자, 초밥집 운영, 늦깎이 대입 등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어떻게 극복했나?
▶15세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제 삶의 전부였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시골집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때 느꼈던 외로움과 두려움 이것이 제 삶을 관통했던 거 같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들에 대해 안타까움이 컸고, 그 이유로 조카를 돌보고 딸까지 입양했어요. 그 아이들의 엄마가 된 건 제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일이에요. 아이들이 오히려 저를 좀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줬고, 항상 제가 바르게 살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어요.
-대학 입학까지 금전적으로 힘드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변호사로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는데 인권변호사를 선택한 이유는?
▶대학에 입학하고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그저 받기만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생계를 위해 계속 일만 했는데, 대학에 입학 후 전 공부만 했는데 학교에서 다 해줬어요. 장학생이 되어 숙식도 제공받고 '와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나?'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어서 감사했죠.
학교 다니면서 제가 받은 혜택을 반드시 갚아야겠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다행히 사법시험을 5년 만에 합격, 졸업 후 연수원에 들어갔을 때 첫 월급은 저처럼 가난한 아이들에게 전부 기부했죠.
2005년 변호사가 된 후 소위 사고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건강한 가정에서 지냈다면 올바르게 자랐을 텐데'라는 마음에 안타까움이 컸죠. 저도 청소년기에 많은 방황을 했고 다행히 유혹에 빠지지 않았지만,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는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죠. 그것이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라도 저 아이들이 건강한 성인이 되도록 도와줘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위탁 보호도 하고 아이들의 변호사가 되어 법정 변론도 맡았어요.
-그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해준 말이?
▶‘어떤 열악한 환경도 너의 꿈까지 가둘 수는 없다. 꿈을 잃지 마라’ 이 말을 가장 많이 해줬어요. 사실 제 삶을 지탱해준 문구이기도 하고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웃음)그렇기는 하지만 애 키워봐서 아시잖아요. 좋긴 하지만 우리 딸은 너무 힘이 넘쳐서 제가 지쳐 졸고 있어도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치켜세워요. 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책을 읽어줘야 잠을 자요. 열 살이니 스스로 읽으면 안 되겠냐? 꼭 엄마가 읽어줘야 한대요. 제가 눈을 몇 번이나 부릅뜨고 읽다가 졸고 있으면 툭 치고... 그래도 참 감사하고. 비타민이죠. 아이들이 아니면 제가 이렇게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느껴진다. 이와 관련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요즘 아이 키우기 참 많이 힘들죠. 저도 너무 힘들었어요. 싱글맘으로 우여곡절도 많았고요.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기도 하고, 유모차에 태워 법원 로비에 아이를 두기도 했어요. 그래도 아이가 좀 크니까 괜찮긴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면 맡길 곳이 없어서 이집 저집 부탁하거나 단골 키즈카페에 맡기기도 했죠.
그래서 변호사회수석부회장 시절 직장 어린이집 TF를 만들었어요. 젊은 변호사들이 많이 늘었으니 변호사회 직장 어린이집을 만들어야겠다. 설문조사를 했는데 많이 희망하더라고요. 그래서 추진을 했는데 장소 마련이 어려워서 포기했어요. 우리나라 육아 환경의 심각성을 몸소 체험한 거죠.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이 되면서 첫 번째 회의 때 이 부분을 말씀드렸어요. 대한민국 저출산은 심각하다. 우리나라는 매일 소멸해가는 국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특위를 구성하고 위원장을 자처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를 대한민국이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고 싶게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낳고 싶은 환경이 안 되잖아요. 20~30대 힘들어요. 집도 없고, 주거도 불안하죠. 이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낳아서 내 아이에게 이렇게 힘든 것을 물려주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점차 벌어지는 소득과 교육 격차, 이것을 해소해야 해요.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토론을 통해 제대로 된 정책을 내고 싶어요.
-어떤 정책을 구상 중인지?
▶현재 아이를 키우는 모두가 공감 할 텐데요. 바로 아이들의 돌봄 공백 상태입니다. 부모의 출근 시간, 부모의 퇴근 전까지 '아이들이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을 메워줘야 한다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깨달았죠. 그래서 여러 가지 정책을 제안하고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동네 이모집'의 활성화입니다. 긴급돌봄센터는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용하기 너무 힘들죠. 거리도 멀고, 오후 9시 30분까지 운영하는 곳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에요. 역발상을 해서 요양보호사들이 어르신들 집에 직접 찾아가듯이 이모가 집에 와서 아이를 돌봐주는 것을 생각했어요. 양질의 교육을 받은 이모들이 많아진다면 일하는 부모들도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두 번째는 학교에서 교육과 보육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전일보육제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지금도 방과 후 교육제도가 있죠. 하지만 원하는 프로그램을 마음껏 선택할 수도 없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무거나 신청하는 경우도 많아요.
전일보육제는 무엇이냐, 지금처럼 정규수업이 1부라고 하면 2부 시간을 두는 거죠. 아이들이 방과 후 학원에 가지 않아도 학교에서 예체능, 취미 생활 등 다양한 교육을 하는 제도입니다.
<김미애의 미소를 보다>
-나를 가장 '미소' 짓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뻔하죠, 뭐! 아이들이죠.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제 딸과 조카. 전화 통화만 해도 저절로 웃게 해줘요. 아이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국민의 대표로서 어떻게 국민들은 '미소' 짓게 하겠는가?
▶참 힘들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모두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데 정치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좋은 정책을 내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 모두가 축복받은 아이들로 대한민국 시스템 속에서 공정한 기회를 받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희망의 사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다시 희망을 꿈꾸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저를 보면 '미애 때문에 웃게 된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tina@kukinews.com 영상제작=우동열 쿠키건강TV PD, 사진=박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