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11년 2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가 병원에 입원했다. 호흡이 어려운 상태였다. 각종 약물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원인 미상 폐렴. 이후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같은해 8월31일 질병관리본부(질본)는 역학조사결과 원인으로 ‘가습기살균제’를 지목했다. 사망자 1687명을 기록해 일명 참사라고 불리는 가습기살균제 사건. 세간에 드러나 진상규명을 시작한 지 올해 10주기를 맞지만 2021년은 참사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 때이기도 하다. 법원이 ‘가습기메이트’를 판매한 SK케미칼, 애경산업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사건을 매듭짓기엔 갈 길이 멀었다며 여전히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쿠키뉴스] 신민경 기자 =“피고인들은 각 무죄”
CMIT, MIT 성분이 함유된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를 판매한 혐의를 받는 SK케미칼, 애경산업에 대한 법원 판결(2021년 1월12일)이었다. 옥시 재판을 경험한 여론은 의아했다.
옥시는 지난 2018년 1월25일 안정성 검증 없이 가습기살균제에 PHMG를 사용한 혐의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인정받았다. 또 실증자료 없이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하여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에 대해 표시광고법을 위반했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올해 CMIT, MIT 성분 가습기살균제에 대한 법원 판결은 달랐다. CMIT, MIT 성분을 사용한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PHMG, PHG 성분을 사용한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다르게 봐야 한다는 것. 지난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2012년 PHMG, PHG 성분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들과 달리 CMIT, 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에 대해서는 고발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법원은 이유를 들었다. 또 질본 동물흡입시험 결과 PHMG, PHG와 폐질환 인과관계가 밝혀졌지만 타 성분은 아직 미지수라고 부연했다.
법원은 인과관계를 증명할 취지의 증언도 없었다고 봤다. 법원이 증인으로 채택한 가습기살균제 연구 전문가들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현재로서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영향이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증거 수준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CMIT, MIT 폐섬유화와 관련된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흡입독성 실험결과는 아직까지 없다 ▲동물실험에서는 폐섬유화를 동반하는 폐 병변과의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동물실험은 제한된 조건에서 수행한 실험으로 이를 통한 인과관계 확인이 어렵다 등이었다.
재판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인정 기준은 근본적으로 PHMG 성분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례로부터 도출 된 것”이라며 “CMIT, MIT 성분 가습기살균제에 그래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피해인정 결과를 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는 형사사건에 그대로 적용해서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황정화 전 환경보건시민센터 공동대표 “9월 재심, 가습기살균제 연구 종합 판단 중요해”
다만 법률 전문가 겸 전 환경보건시민센터 공동대표 황정화 변호사는 가습기살균제 연구 결과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지 않은 법원 판단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달 초 법무법인 경연 사무실에서 만난 황 변호사는 SK케미칼, 애경산업 재심 준비에 한창이었다. 지난 1월27일 검사는 SK케미칼, 애경산업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에 상소했다. 황 변호사는 피해자 대리인 제도를 통해 사건을 위임받아 오는 9월 있을 재심을 돕고 있다.
황 변호사는 “판결문에서 인용된 연구 결과가 10개가 넘는다”면서 “각각의 연구들이 한계가 있을 수 있고 편향도 있을 수 있다. 연구는 전문가들이 낸 결과물을 종합해 판단해야 의미있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 2~3가지 지점에서 연구를 종합해 검증하는 단계를 거쳤으면 공감 얻을 만한 판단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씁쓸해했다.
황 변호사는 해당 재판 증인에 나섰던 전문가들이 법원 판결에 의아해 했다는 후문도 전했다. 각 연구자들은 본인의 연구가 판결에 어떻게 인용됐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 황 변호사는 “각 전문가들은 본인 연구 제한점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다른 연구의 결과를 알았다면 법정에서의 진술이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하소연했다”며 “1심에서 증언했던 핵심 전문가 증인들이 대부분 이의를 제기하면서 진술서를 제출했다. 검사 측에서는 이들을 다시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신청했는데, 항소심에서 채택될 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피해 기간이 길고 오래됐다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특성도 재판에 불리했다. 통상 일반 범죄는 피해 시기를 특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생활용품이라 사용시기를 특정하기 힘들고 여러 제품을 섞어 쓸 수 있어 문제 제품 솎기도 어렵다.
이에 황 변호사는 “인과관계를 증명할 엄격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형사 재판 특성을 잘 안다. 이에 피해를 일으킨 제품을 특정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점도 공감한다”면서도 “다만 가습기살균제 참사에서 특수한 상황도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 피해 제품 규명보다 먼저 피해를 인정하고 인과관계 규명을 해나가는 것도 피해자들을 구제할 방법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옥시가 유죄 판단을 받았다고 해서 본받을만한 판례는 아니다. 신현우 전 옥시 대표에 대해 법원은 7년형을 부과했다. 업무과실상치사 5년, 표시광고법 위반 2년형이 인정됐다.
옥시 판결을 두고 황 변호사는 “옥시가 배상한 피해자만 400명이다. 1명에게 피해만 입혀도 7년, 400명에게 피해를 입혀도 7년”이라며 “수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에서도 동일한 형법으로 처벌하는 수위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등 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현 처벌 수위라면 가습기살균제 참사,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이란 보장은 없다”고 진단했다.시간은 많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황 변호사는 “폐질환뿐 아니라 원인 모르는 증상을 호소하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이들이 많다”며 “가장 큰 애로사항은 부담되는 치료비일 것이다. 사지로 몰리고 있는 피해자들을 향한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길어지는 법적 공방에 기업도 지친 분위기다. 늘어지는 법원 판단에 기다리고 있을 수 만은 없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할 기회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신음을 내는 피해자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지진부진했던 가습기살균제 진상 규명의 도약을 바란다는 황 변호사. 그는 한계에 부딪힌 법리 대신 중대재해처벌법 등 새로운 사회적 합의점을 찾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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