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시급성을 강조하던 정부가 물가상승이 우려된다면서 내년 1분기 전기요금을 동결했다. 국제유가 상승 여파로 연료비는 치솟고 있는데 에너지 공기업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앞둔 에너지공기업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에너지 업계를 중심으로 높아지고 있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정부의 결정으로 내년 1분기(1~3월) 연료비 조정단가를 0원/kWh로 확정했다. 올해 4분기와 동일한 수준의 전기요금을 내년 1분기까지 유지한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발생했지만, 물가상승을 억제하겠다는 정부 의지가 반영됐다.
한전은 앞서 유연탄, 액화천연가스(LNG), 벙커씨유(BC유) 등 전력 생산원료의 국제 가격이 오르자 ‘연료비 연동제’를 적용해 kWh당 3원을 올려야 한다는 전기요금 인상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정부가 코로나19 장기화와 높은 물가상승률 등 국민 생활 안정을 이유로 요금 인상에 제동을 걸었다.
전기요금 합리화를 위해 지난해 ‘연료비 연동제’가 도입됐지만, 여전히 정부 입김이 작용하면서 사실상 가격 통제를 받고 있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동결하면서 한전은 재정 건전성을 우선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연료비 상승에 따른 전력 구입비는 증가했지만, 소비자에 공급되는 전기요금은 제자리걸음 하면서 적자 폭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한전은 지난 3분기 누계 영업적자 9367억원을 기록했다.
탄소중립 실현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한전이 재정 악화에 빠지면 재생에너지 부문 대규모 투자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전력을 생산하는 에너지 기반 마련이 우선임에도 정부는 에너지 공기업에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면서 “올해 적자가 예상되는 한전이 탄소중립 관련 투자에 얼마나 적극 나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탄소중립을 실현코자 한다면 무엇보다 연료비 연동제를 제대로 적용해 전기요금 정상화를 이루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학계에서는 이번 전기요금 동결 결정에 대해 비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기요금 현실화를 위해 지난해 말 도입한 ‘연료비 연동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이렇게 통제할 요량이면 굳이 연동제를 만들 필요가 있었겠냐는 무용론까지 제기하고 있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연료비 연동제는 복잡하고 오래 걸리던 전기요금 인상 과정을 효율화한 행정 제도로 연료비 변동이 생길 경우, 자동으로 소비자가에 반영되도록 하는 취지”라며 “하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정부 승인을 거쳐야만 해 애초 의도했던 연료비 연동제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전력 생산 원가가 올랐다고 무조건 소비자에게 매번 전가할 수 없다”며 “공공목적으로 조성된 전력산업기반기금 사용처를 전기요금 변동 보조 명목까지 확대 적용하는 방안이 연료비 연동제를 보완하는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전기요금 동결 결정은 정부의 종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전이 적자 전환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이 나오지만, 몇 분기 단기적인 유가 변동 폭은 충분히 감내할 수준으로 한전 탄소중립 투자에도 전혀 무리 없다는 의견이다.
임춘택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은 “장기적으로는 연료비 연동제가 적용돼 전기요금 합리화할 필요가 있지만, 물가 안정화라는 과제가 단기적으로는 더욱 중요한 걸로 정부가 종합 판단한 걸로 보인다”며, “한 분기 정도 지나면 유가가 하락할 요인들이 많고, 자산규모가 큰 한전과 에너지 공기업들은 단기적인 변동 폭은 충분히 흡수할 여력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전이 재작년까지는 적자를 봤지만, 지난해 낮은 유가와 높은 원전 가동률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바 있다”며 “올해 이례적으로 유가가 3달을 넘게 급등하면서 올해는 적자를 볼 수 있지만, 당장 한전의 부실로 이어진다고 볼 문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