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들에게는 고향이 없다” 서울 골목길에 떠도는 쓸쓸한 농담이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명분 앞에 빠르게 바뀌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1980년대 성장 중심의 개발 정책이 시행되면서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고 생계유지 수단을 잃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거나 오래 살아온 이들은 당시 사라진 숱한 집과 가게들을 기억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개발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충정로 한편에서 49년간 서울 사람들의 추억이 되고 있는 철길 옆 한 떡볶이 가게가 행정편의를 앞세운 개발사업으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무너질 위기에 놓인 서울의 고향…그 떡볶이, 우리는 계속 먹고 싶다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푸른 분식 접시에 떡볶이를 한가득 담았다. 접시에 담긴 떡볶이의 양만큼, 건네받는 손님의 표정도 따듯해졌다.
“사장님, 뭘 또 이렇게 많이 주세요. 진짜 여전하시네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철길 옆에 자리한 한 분식집 ‘XX 떡볶이’는 지난 1973년부터 49년째 운영돼온 곳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가게가 수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장소다. 가게는 60대 동갑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가게는 지상과 지하를 합쳐 39.7㎡(12평) 남짓이다.
가게는 아담한 내부와 철길 방향으로 나 있는 야외로 이뤄져 있다. 바깥 테이블에 앉으면 기차가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하에는 노부부의 거주 공간이 있다. 이들은 매일 아침 바로 위 가게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 이곳은 이들 부부에게 생업의 공간이자, 집이다.
막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인 오전 11시30분. 가게에는 속속 손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서울을 지킨 가게인 만큼, 찾는 이들은 대부분이 단골손님이었다. 건강하시죠, 날씨가 추워졌어요. 오는 손님마다 주인 부부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메뉴판을 보지 않고도 주문을 하고, 사장 부부가 놓기도 전에 알아서 식기와 반찬을 챙겨오기도 했다. 식당마다 흔히 있는 ‘셀프(self)’ 표시가 필요 없었다.
철길 떡볶이집 인근 국민연금에서 근무하는 김수현(가명)씨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입맛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늘 생각나서 찾아오는 오랜 친구 같은 가게”라며 “춥지 않은 날 야외 자리에 앉아 철길 풍경을 보며 저녁을 먹으면 그날의 우울했던 기분도 털어낼 수 있다. 나는 서울에 딱히 단골 가게라고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는데, 이곳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찾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의 바람은 지켜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가게가 곧 문 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관할 구청에서는 가게를 포함한 인근 부지에 대한 철거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철길 떡볶이집’ 부수려는 구청, 지키고 싶은 사람들
서대문구청은 노부부의 가게를 포함한 인근 부지에 녹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 계획은 1978년 처음 수립됐다. 이후 40여 년이 넘도록 추진되지 않고 방치되어왔다. 구청이 사업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7년이다. 사업 기간이 오래돼 추진 권한을 잃을 시기가 다가오자 서둘러 사업을 진행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구청의 사업 추진은 벽에 부딪혔다. 사업부지의 대부분이 국토교통부와 철도청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서대문구청은 방음벽을 이유로 녹지조성을 하겠다며 해당 토지를 무상으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국토부가 추진하는 별도의 사업 계획이 있어서다.
이후 구청은 국토부 소유 면적을 포함해 문제가 되는 부분을 대부분 계획에서 제외했다. 그 결과 사업 추진 가능 부지가 3%만 남게 됐다. 당초 녹지 조성 예정 면적이 5000㎡(1512.5평)이었으나, 변경 이후 158㎡(48평)으로 축소됐다. 방음벽을 이유로 한 녹지조성 목적은 사실상 무의미해진 셈이다. 그러나 구청은 3%의 면적이라도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서대문구청 관계자는 “국토부는 해당 녹지에 대해 추상적인 계획만을 갖고 있다. 국토부가 추진하는 큰 사업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밀한 도시사업 계획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현재는 과하게 축소되어서 면적이 작지만, 계속해서 협의를 통해 늘려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청은 사장님에게 철거의 대가로 3500만원을 제시했다. 서울 시민들의 49년 추억과 노부부의 생계유지 수단, 몸을 누일 잠자리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대가’라기에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사장님은 맞서 싸워보기로 했다. 이들은 지난 2017년부터 서대문구청과 수년째 소송 중이다. 노부부의 생존권과 서대문구청의 사업계획에 절차상 위법이 많다는 점, 사업이 생계와 주거권을 위협할 만큼 공익이 크지 않다는 점을 호소했다. 1심에서는 패소했다. 재판부는 위법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며 노부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철길 떡볶이집 사건은 현재 서울고등법원 행정부에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항소심은 ‘법률사무소 해내’의 한용현 변호사가 맡았다.
한 변호사는 “서대문구청의 이번 사업은 행정을 위한 행정이다. 당초 1500평 부지에 구체적인 내용 없는 계획을 급하게 세웠다가, 그 뒤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48평으로 97% 축소했다. 구청이 수십 년 동안 실시되지 않은 사업 권한 상실 방지 목적이라고 공지하기도 했다”며 “축소된 계획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다. 48평의 작은 면적, 철길 양쪽이 아닌 한쪽 면만으로는 소음 제어 등 완충녹지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한다. 우범화나 미관이 문제라면서 바로 옆에 있는 고물상은 포함되지 않았다. 1심에서 충분히 입증되지 못했던 위법성을 항소심에서 보강하고, 판결을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철길 떡볶이집이 그저 사업 권한을 잃지 않으려는 구청의 행정편의주의에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고 강조했다.
떡볶이집 사장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고 하면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밀려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의가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우리는 이 토지를 무상으로 사용해오지도 않았다. 서대문구청에 사용료를 납부해왔다”며 “구청은 1500평대 녹지를 조성하는 것이 합당하고, 정의인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우리를 설득했던 그 1500평은 허구다. 그 어마어마한 부지가 밀리는 게 확정이라고 하더니 반의반도 안 되게 줄었다. 매번 말이 달라지다가, 이제는 아주 작은 공원이라도 만든다고 나가라고 한다. 약자를 밀어내는 과정에 최소한 공정과 원칙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결국 패소해 밀려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쓰게 웃던 사장님은 말을 잇지 못했고, 곁에서 인터뷰에 귀 기울이던 손님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항소심 재판의 최종 선고일은 오는 2022년 1월19일이다.
본 기사는 후속 ‘약자 앞에 강한 행정, 사람 없는 사업 [철거되는 서울의 추억②]’ 로 이어집니다.
안세진 지영의 기자 ysyu1015@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