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원자력과 천연가스 발전을 친환경 녹색에너지에 포함하는 규정을 확정·발의했다. 유럽뿐 아니라 미국·중국 등 세계 주요국들도 원전을 다시 건설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탈원전을 고수해온 한국 정부에도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 2일(현지시간) 원전과 천연가스에 대한 투자를 환경·기후 친화적인 지속가능한 금융 녹색분류체계(Taxonomy·택소노미)로 분류하는 규정안을 확정·발의했다. 택소노미에 포함될 경우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 및 금융 지원이 용이하다.
지난달 1일 발표한 녹색분류체계(택소노미) 초안을 확정해 의결에 부친 것으로 향후 4개월간 공식 논의 후 승인되면 내년 1월부터 시행된다. 안건에 올려진 택소노미 수정안은 무난히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부결되기 위해선 최소 20개 회원국이 반대하거나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과반수 반대를 얻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집행위는 녹색분류체계에 원전과 천연가스 발전을 포함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신규 원전은 2045년 전까지 건축허가를 받고, 이를 위한 자금 및 부지 계획을 제출해야만 한다. 또 사용 후 핵연료 처분 시설 운영 세부 계획을 2050년까지 마련해야만 한다. 기존 원전은 2025년부터 더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핵연료(사고저항성 핵연료) 사용 조건으로 2040년까지 승인을 받아야 한다.
천연가스 발전은 전력 1킬로와트(kW) 생산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가 270g CO2eq(이산화탄소 환산량) 미만 또는 20년간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이 550kg CO2eq 미만의 경우에만 녹색에너지로 인정받는다.
유럽연합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 등도 원전을 다시 건설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말 원자력 발전을 ‘무공해 전력’에 포함시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2035년까지 원전 150기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최근에는 중국이 독자 개발한 원자로 화룽 1호 기술을 적용해 아르헨티나 원전 건설 계약 수주도 성공했다.
국제적 동향이 바뀐 이유는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목적이 크다.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재생에너지는 탄소 배출이 없지만, 간헐성이란 치명적 단점을 지녔고, 안정적이고 충분한 전력 수급을 위해서는 원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방사능을 내뿜는 사용 후 핵연료(방사성 폐기물) 처리에 대한 위험성은 내재하고 있어 후처리 기술 개발은 필요한 상황이다.
다수 국가가 원전을 녹색에너지에 포함시키고 원전 회귀를 선언하면서 지난해 말 원전을 뺀 K-택소노미(한국형 녹색분류체계)를 발표한 한국 정부는 난처해졌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기조를 반영해 원전을 K-택소노미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국제적 동향과 현실적 국내 산업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탈원전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산업계는 K-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을 요구하면서 탈원전으로 일관해온 정부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이날 논평을 내고 “정부는 한국형 녹색분류체게(K-택소노미) 가이드라인을 재검토해 원자력 발전을 녹색 기술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경련은 “미국, 중국에 이어 EU도 원전을 탄소중립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데 반해 우리나라만 거꾸로 가고 있다”며 “지난해 12월 환경부가 발표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지침서에서 원자력 발전이 제외됨에 따라 신규 원전 건설과 차세대 원전 기술 투자의 동력이 상실될 우려가 높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달 유럽연합 택소노미에 원전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게 점쳐지자 기준과 사유를 면밀히 살펴 K-택소노미에도 일부 반영하겠단 입장을 냈다. 한정애 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EU가 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하느냐 여부에 따라 국내에서 다시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