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이름 없던 배우가 순식간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유명 작가 신작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돼서다. 사람들은 그를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모두의 주목 아래 그는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배우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일순 수렁에 빠진 듯한 막막함을 느낀 때도 있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맞이한 2021년. 과거 자신과 같은 상황을 마주한 신인 배우와 한 작품에서 만났다. 신인에게서 지난날 자신을 봤다. 초심을 되새겼다. 절박한 마음으로 캐릭터에 뛰어들었다. 배우 박하나는 KBS2 ‘신사와 아가씨’를 만나 슬럼프에 안녕을 고했다.
“마음껏 뛰어놀았어요.” 지난 4일 만난 박하나는 ‘신사와 아가씨’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포근하고 다감한 현장에서 그는 조사라의 시간을 살았다. 조사라는 전부터 좋아한 이영국(지현우)과 자신의 아들 이세종(서우진)에 집착해 악행을 벌이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구애하는 차건(강은탁)의 마음은 외면한다. 이영국이 기억을 잃은 틈을 타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던 조사라는 모든 진실이 드러나며 결국 몰락한다. 박하나의 마음엔 지금도 조사라가 애틋하게 남아 있다.
“장편 드라마는 종영까지 5회 정도 남겨뒀을 때가 가장 지치고 힘들거든요? 그런데 ‘신사와 아가씨’는 달랐어요. 100부작이어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안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정말 원했던 작품이고 조사라도 매력적이라 보내주기가 더 아쉽나 봐요. 시즌 2가 나오면 좋겠다 싶을 정도예요. 매 순간 사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매 장면 몰입해서 촬영했던 기억이 나요.”
여러 악역을 경험했지만, 조사라는 특별했다. 조실장이라는 애칭도 생겼다. 기억을 잃고 스물세 살로 돌아간 이영국이 쓰던 별칭 ‘조실장 누나’는 MZ세대에게 통용되는 ‘밈’(Meme)이 됐다. 주변에서 자신을 조실장님으로 부를 때마다 즐거웠단다. 김사경 작가는 대본 리딩 현장에서 연기하는 박하나를 본 뒤 지고지순하고 조용하던 조사라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꿔 대본을 다시 썼다. 박하나는 달라진 조사라에 푹 빠져들었다.
“바뀐 대본을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기존 조사라가 청순했다면 새로운 조사라는 당차고 뻔뻔해졌거든요. 재미있게 보여줄 요소가 많아져서 기뻤죠. 가장 먼저 머리부터 싹둑 잘랐어요.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덕분에 하고 싶은 연기를 마음껏 해냈어요. 제 자신에게도 위로가 됐어요. 배우, 스태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행복하게 웃던 현장이었어요. 덕분에 캐릭터에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이런 분위기를 시청자분들도 느껴주신 것 같아요.”
악행과 기행을 일삼는 인물이었다. 왕대란(차화연)과 공모해 박단단(이세희)에게 누명을 씌우고 차건의 아이를 이영국의 아이로 속여 그의 집에 다시 입성하는 등 여러 장면에서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드라마에 과몰입한 일부 시청자가 협박해 SNS 댓글 창을 잠시 닫았다. 그럼에도 박하나는 배우로서 조사라의 심정을 이해하려 했다. 동료 배우에게도 힘을 얻었다. 박하나는 지현우, 이세희, 차화연, 강은탁 등 배우들을 언급하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조사라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간 든든한 동반자들이다. 덕분에 박하나는 6개월간 조사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배우는 캐릭터를 무조건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캐릭터를 이해하지 않으면 시청자분들도 다 아시거든요. 저는 대본과 장면을 믿어요. 그 흐름에 저를 맡기려 했어요. 사라가 심적으로 극한에 몰린 만큼 저라도 보듬어줘야겠다 싶었죠. 사라가 회장님 집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이 정말 추웠거든요? 심지어 저는 외투도 입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너무 몰입하다보니 추위가 안 느껴지더라고요. 그 순간 오롯이 사라가 된 거예요. 새로운 것들을 많이 느꼈어요.”
조사라에 쏟는 그의 진심은 안방에도 가 닿았다. 열연이 관심을 얻으며 그가 MBC ‘압구정 백야’에서 이보희와 독대했던 장면이 다시금 회자됐다. 박단단으로 이름을 알린 이세희처럼 박하나는 ‘압구정 백야’의 ‘야야’로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쉴 새 없이 달려왔지만, 여전히 연기가 고프다. 경력이 쌓일수록 쉽게 연기하려는 스스로에게 실망해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사와 아가씨’로 그는 자신감을 되찾고 새 전환점을 맞았다. 박하나는 “이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서 “지금 한 30% 정도 그렸다”며 씩 웃었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했어요. ‘죽을 때까지 연기하다가 방송국에서 죽겠다’고요. 지현우 오빠가 그 말 듣고 엄청 웃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진심이에요. 배우는 수명이 없는 직업이잖아요. 이제 10년차인데 앞으로 60년 정도는 거뜬하지 않을까요? 평생 연기하며 온갖 캐릭터도 다 해볼 거예요. 액션, 장르물, 로맨틱코미디 다 하고 싶어요. 어렵게 느껴지던 역할도 해내고 나면 그만큼의 성취감과 희열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연기가 참 설레요. 다음 캐릭터도 조사라처럼 아무 계산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급하게 욕심내진 않을 거예요. 앞으로 60년은 더 일할 거니까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