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의 정(잘못을 뉘우치는 마음가짐과 태도)이 뚜렷한 의료인에게 재기의 기회를 줘 의료 현장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의료법 취지와 공익에 부합한다.”
10년 전 지인에게 수면유도제를 투여했다가 사망하자, 시신을 유기해 면허를 박탈당한 전직 의사가 법원 판결로 의사 면허를 다시 받게 됐다. 의사면허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는 전직 의사 A씨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면허 재교부 거부처분을 취소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지난달 30일 내렸다.
“무료 봉사활동, 동료 탄원” 재판부가 설명한 이유
A씨는 지난 2012년 7월 지인이 “잠을 푹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약물 투여를 요구하자 충분한 검토 없이 마약류인 미다졸람과 여러 마취제를 투여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A씨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지인의 시신을 실은 차량을 공원에 두고 떠나 시신도 유기했다. 그는 2011년 6월~2012년 3월에도 몰래 빼돌린 프로포폴을 세 차례 지인에게 투약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A씨는 2013년 업무상 과실치사죄, 사체유기죄, 마약류관리법 위반죄, 의료법 위반죄 등으로 징역 1년6개월에 벌금 300만원의 형을 선고받았다. 형사처벌 전력을 이유로 2014년 8월 의사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다. A씨는 재교부 금지 기간이 지나고 2017년 8월, 복지부에 의사면허를 다시 교부해달라고 신청했다. 복지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A씨는 지난해 3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A씨가 10년 가까이 의사로 봉직하지 못해 의료기기 판매업,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요양병원 행정업무 등을 전전했다며 “많은 후회와 참회의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A씨가 출소 이후 수년간 비영리단체에서 무료 급식 자원봉사활동을 해왔으며 의료인 동기와 동료 등이 복직을 탄원하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복지부는 판결에 불복, 항소했다.
매년 반복되는 의사 면허 논란…타직종과 형평성 문제도
의사면허 관리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9년 서울 한 대형병원의 수련의는 수술 도중 여성 환자의 신체를 반복적으로 만지는 등 강제추행을 저질렀다. 다니던 병원에서 수련이 취소되자 서울의 다른 병원으로 옮겨 수련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공분이 일었다. 지난 2018년에는 한 개인병원 의사가 간호조무사를 12년 동안 성폭행하고 이를 불법 촬영했는데 여전히 같은 병원을 운영 중인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법원이 선고한 형량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에 그쳤다.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가 ‘직무와 관련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때만 면허 취소가 가능하다. 의사 면허 취소 사유는 △허위진단서 작성 및 진료비 부당 청구 △업무상 비밀 누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면허증 대여 △부당한 경제적 이익(리베이트) 취득 △비도덕적 진료행위(일회용품 재사용) 등 한정적이다. 금치산자, 정신질환자, 향정신성의약품 중독자도 취소 대상이다. 살인, 성폭행, 절도 등 중범죄를 저질러도 의사의 면허를 취소할 법적 근거가 없는 셈이다.
다른 직종과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변호사·공인회계사·변리사·세무사 등 전문직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 자격을 잃도록 규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의사면허는 설령 잃더라도 다시 발급받기 어렵지 않다. 면허 재교부 금지 기간이 지난 뒤에 의료인이 신청을 하면 복지부가 심의를 거쳐 면허 재교부를 한다. 그런데 명확한 규정 없이 심의가 허술하게 이뤄진다는 비판이 많다. 지난 2019년까지 10년간 의사면허 재교부 신청·교부 현황에 따르면 의사면허 재교부 신청(75건) 승인률은 100%였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복지부는 의사 4인이 포함된 면허 재교부 심의위원회 구성을 변경하고 심의 과정에서 엄격한 윤리기준을 반영한 지표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사 위법행위, 공익 해쳐…엄정히 처벌해야”
의사 면허 개정안이 국회에서 수차례 발의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은 의사의 면허를 취소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강병원 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1년 넘게 계류 중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면허 재교부가 가능하도록 여지를 남겼음에도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직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면허강탈 법이라며 반발했다. 최대집 전 의협 회장은 당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일주일 앞두고 참여를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김준현 건강정책참여연구소 소장은 “의사 면허는 환자에게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공익적 목적으로 국가가 부여하는 것”이라며 “의사의 위법행위는 사회 전체 공익을 해치는 행위다.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의료계에서는 의사의 범죄 행위를 느슨하게 처벌해왔던 관행을 정리하고 자신들이 해야 할 공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마약류 관리법 위반죄, 의료법 위반죄보다 사체유기죄, 살인죄, 강도죄, 성범죄가 죄질이 더 불량한데도 의료인은 면허가 취소되지 않는다. 면허가 취소되더라도 반성문을 잘 작성하면 복지부가 대부분 면허를 재교부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인 의료법 개정안이 신속히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