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칼 맞는 의사…“의료기관 보호, 국가 책임”

병원에서 칼 맞는 의사…“의료기관 보호, 국가 책임”

공포에 떠는 의사들…“임세원법만으로는 부족”

기사승인 2022-06-21 06:17:02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 강봉수 경기도의사회 회장 직무대행, 이동욱 전 경기도의사회장, 이동훈 용인시의사회장 등이 지난 17일 경기 용인 용인동부경찰서를 방문해 엄중한 수사와 처벌을 요청했다.   대한의사협회

응급실 의사가 앙심을 품은 환자 보호자로부터 낫에 베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료계에서는 가해자 엄벌과 실효성 있는 재발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서울시내과의사회는 19일 제26회 정기총회 및 학술대회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기 용인 한 종합병원에서 벌어진 의사 피습 사건을 거론했다.

박근태 대한내과의사회 회장은 “환자 보호자가 선물을 주겠다며 낫을 휘둘러 의사의 뒷목 부위를 베었다. 잘못됐다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면서 “열심히 진료해도 의도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보호자가 병원에서 난동을 피우는 일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응급실에서 누가 진료를 보려 하겠나”라고 우려했다.

수원지법은 지난 16일 응급실 의사에게 상해를 입혀 살인미수 혐의를 받는 A씨(74)에 대해 구속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열고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사건은 지난 15일 발생했다. 경기 용인시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A씨는 “선물 드릴 게 있다”면서 근무 중이던 응급의학과 의사 B씨에게 다가갔다. A씨는 품에 숨기고 있던 낫을 꺼내 B씨 뒷덜미를 내리쳤다. B씨는 뒷목에서 어깨까지 10cm가량의 깊은 자상을 입었다. B씨는 응급 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지난 11일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된 아내가 끝내 사망하자, 의사가 조치를 미흡하게 했다는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A씨는 병원 직원에게 피해자 근무 시간까지 확인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의료계에서는 즉각 우려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지난 17일 긴급성명서를 내 “응급의료현장은 높은 긴장과 불안 상태에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곳이기에 병원 내 다른 장소보다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장소”라며 “보여주기식의 성의 없는 대책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 이제라도 현장의 전문가들과 재발방지와 개선방안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역시 “대한민국 의사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 노출돼 있으며, 최소한의 기본적인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어려운 여건에서 일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또 “칼 들고, 낫 들고 의사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강력 범죄에 대한 근본적 대책부터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 영결식.   쿠키뉴스 자료사진

의료인을 상대로 한 폭행 사건은 매년 끊이지 않는다. 지난 1월에는 서울 송파구에서 30대 남성이 “4년 전 진료받은 부위가 아프다”면서 여성 의사를 둔기로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에는 양평 치과의사와 전남 벽오지 공중보건의사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20년에는 전북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폭행 사건, 부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살해 사건, 서울 치과의사 흉기 피습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경찰청에서 지난 1월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매년 2000건 안팎의 폭력 범죄가 의료 기관에서 발생한다. 2016년 1818건, 2017년 1729건, 2018년 2524건에 이르렀다.

지난 2018년 말에는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가 진료 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사망했다. 이듬해 ‘고(故) 임세원법’이 시행됐다. 의료인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가중처벌하고, 의료 기관 내 보안 인력과 비상벨 배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이다.

하지만 법 시행에도 폭행 사건은 줄지 않았다. 2019년 2522건, 2020년 2194건이었다. 그러자 임세원법의 취지는 좋지만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강선우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지난 2020년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임세원법에 따라 보안인력 배치, 비상경보장치 설치 의무화를 준수한 병원은 각각 전체의 45%, 30%에 불과했다.

또 적용 범위가 ‘100병상 이상’ 병원에 한정돼 일반 병·의원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같은해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전국 3만6425개 의료기관 중 임세원법 적용 대상은 1048개로 2.9%에 그쳤다.

김이연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기존에는 뒷문을 만들고 벨을 설치하는 등 의료기관 스스로 보안 강화 노력을 기울이는 방식으로 노력해왔다”면서 “이번 사건처럼 근무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접근하는 등 철저한 계획범죄를 막기는 역부족이다. 정신과 의사들 같은 경우에는 비슷한 일이 벌어져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높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의료기관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은 엄연히 공익적 영역이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의료인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면서 “중앙정부의 의료기관에 대한 순찰·경비 강화와 의료기관내 폭력 행위에 대한 반의사불벌죄 배제 등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강조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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