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박해수)은 9인의 강도단에서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다. 다른 인물들이 모두 교수(유지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협조할 때 정반대로 엇나가며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딱히 돈이나 권력에 욕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누구보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대체 왜 강도단에 합류했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지난 24일 공개된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1’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빌런이 누구냐고 물어도, 가장 존재감이 큰 인물을 물어도 베를린이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1’ 제작보고회에서 MC 박경림은 배우 박해수를 ‘넷플릭스 공무원’이라 불렀다. 영화 ‘사냥의 시간’부터 ‘오징어 게임’,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까지 벌써 넷플릭스 오리지널만 세 작품에 참여했다. 그의 드라마 데뷔작인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도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이다. 지난 28일 화상으로 만난 박해수는 “하다 보니 넷플릭스에서 여러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며 “좋은 작품으로 좋게 인사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대본을 받은 순간을 떠올리며 원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스페인 원작을 처음 봤을 때는 한국 리메이크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였어요. 제가 캐스팅될 거란 생각도 안 하고 봤어요. 스페인 문화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있더라고요. 한국판 드라마는 원작과 서사가 다르고 분단 서사를 응축시키는 캐릭터여서 매력적이었어요. 부담도 됐고 무섭고 무거웠죠.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진지하게 접근하고 싶어서 ‘종이의 집’에 들어오게 됐어요. 원작을 따라가거나 같은 캐릭터로 접근하긴 어려웠습니다. 제가 받은 대본에서 캐릭터가 가진 아픔을 이해하려고 연구를 많이 했어요. 여러 좋은 배우, 만나고 싶던 배우들이 있어서 함께 작업하는 것에 대해 기대하기도 했고요.”
일부러 원작 베를린과 차이를 두려고 하진 않았다. 차이점을 만들려고 해도 안 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판 베를린, 송중호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보려고 했다. 어떻게 하면 베를린이 가진 사연과 아픔을 숨기면서 냉철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박해수는 오로지 그것에 집중했다.
“베를린은 북한 정치수용소에서 25년 동안 감금을 당했어요. 잘못해서 정치수용소에 간 게 아니에요. 교도소가 아닌 거죠. 베를린이 가진 감정은 억울한 마음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나갈 수 있다는 희망부터 아버지에 대한 생각 등 많은 감정이 있었겠죠. 오랜 시간 수용소에 있으면서 그 감정들이 딱딱한 벽돌로 변하면서 무뎌졌을 거예요. 베를린이 수용소 출신이라는 걸 들었을 때부터 마음가짐을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겠다, 잘 준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픔을 고스란히 표현하기에 부족하지만, 그래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니까요.”
‘종이의 집’ 촬영을 시작한 건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지난해 9월쯤이었다. 지난해 ‘오징어 게임’처럼 크게 화제를 모은 작품은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박해수에게도 해외 영화인과 창작자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 어마어마하게 좋은 우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OTT의 가장 큰 장점은 전 세계 많은 시청자들이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장점이자 단점은 보다가 건너 뛸 수 있다는 거죠. 숙제인 것 같다. 영화와 연극은 보다가 건너뛸 수 없잖아요. 내 발로 극장을 찾아가는 행위부터 본다는 행위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작가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는 작가주의적인 면이 있죠. 지금은 개인적인 자유가 더 많이 주어지니까 건너 뛸 수도 있고 OTT를 더 많이 찾는 것 같아요. 분명한 장단점이 같이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의 인기, 한국판에 대한 기대 모두 컸던 탓일까.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호평과 혹평을 고루 받고 있다. 29일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 세계 2위(플릭스 패트롤 기준), 국내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아쉽다는 반응도 많다. 박해수 역시 이를 의식하며 그래도 봐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전에 시청자 반응을 많이 안 찾아보는 편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솔직히 많이 찾아봐요. 이번에도 많이 봤어요. 요즘 시청자 관객 분들이 갖고 계신 생각을 알고 싶고, 잠이 안 오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더라고요. 혹평도 많고 호평도 있어요. 호불호가 없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다양한 반응을 보면서 관심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관심이 있으면 작품을 봤다는 얘기잖아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