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강렬하다. 등장만 하면 섬뜩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극악무도한 킬러 스파이시(김태훈)는 자신이 키워낸 킬러 앨리스(박세완)에게 배신당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산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기괴한 미소를 짓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잔혹한 말들을 서슴없이 한다. 복수의 칼날만 가는 그는 왓챠 오리지널 ‘최종병기 앨리스’의 긴장감을 좌지우지하는 요주 인물이다. 스파이시를 연기한 김태훈을 지난 7일 서울 여의도동 모처에서 만났다.
‘최종병기 앨리스’는 킬러 앨리스라는 정체를 숨기는 의문의 전학생 겨울이 비폭력으로 학교를 평정한 여름(송건희)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김태훈은 앨리스를 쫓는 무자비한 킬러 스파이시를 연기했다. 스파이시는 전 세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 킬러로 키워내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앨리스에게 배신당한다. 앨리스가 쏜 총에 맞아 성 불구자가 되고, 그를 다시 만나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에 망가진 삶을 산다. OCN ‘나쁜 녀석들’, MBC ‘앵그리맘’ 등 여러 작품에서 악역을 소화한 김태훈이지만, ‘최종병기 앨리스’와 스파이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렇게까지 극한에 치달은 캐릭터는 처음이었어요. 비정상적인 악역이어서 표현과 행동 등 모든 것에 제약이 없었죠. 웃어도, 울어도 상관없었거든요. 새롭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돼요. 작품 자체도 일반적인 드라마를 촬영할 때와는 달랐어요. 전형적이지 않은 분위기로 가득 채워졌거든요. 신선하고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어요. 흔히 ‘B급 정서’라고 하죠? 그런 톤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실험적인 느낌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만화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에 고등학생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과 풋풋함, 킬러 세계의 잔혹함이 얼기설기 엮였다. 스파이시는 마약에 취해 환각상태로 살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가는 만큼 김태훈은 시청자가 납득할 수 있는 연기에 중점을 뒀다. 스스로 스파이시의 마음을 믿는 것 역시 중요했다.
“제가 인물을 믿어야 정당성이 생겨요. 표현에만 급급하면 인물을 흉내 내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면 보는 분들도 제가 캐릭터를 따라 하고 있을 뿐이란 걸 눈치 채요. 추상적인 느낌보다는 실재하는 인물처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런 점에서 스파이시의 모든 행적에 대해 상상했어요. 그에게 이런 행동들이 왜 정당한지를 고민했죠.”
김태훈은 스파이시의 분노가 단순히 적개심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봤다. “배신감이 가장 컸을 거예요.” 믿었던 애제자가 벌인 일을 믿지 못해 그를 찾아 헤맨다고 생각했단다. “스파이시에게 앨리스는 선생이자 어른으로서, 인간 대 인간으로 가장 좋아하는 제자였어요. 잘 키워내려 했는데 그렇게 도망갔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앨리스를 쫓는 건 복수나 심판이 아닌 집착 때문이라 생각했어요.” 김태훈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방향성을 잡았다. 서성원 감독과도 수차례 논의를 거쳤다.
“감독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첫 만남 때부터 감독님의 솔직함에 감탄했죠. 대뜸 ‘이제 어떡하죠?’라고 하셨거든요. 하하. 그게 불안하기보다는 제가 뭘 해도 받아줄 것이란 확신으로 와닿았어요. 현장에서도 ‘이렇게 수정되면 더 명확하겠다’고 의견을 내면 흔쾌히 들어주셨어요. 그 장면에 대한 감독님의 의견도 말씀해주셔서 더욱더 캐릭터가 살아날 수 있었어요. 이병헌, 서성원 감독님의 대본 속 ‘말 맛’도 흥미로웠어요.”
겨울과 여름을 연기한 박세완, 송건희와 호흡도 인상 깊게 남았다. 극 중 여름과 스파이시의 독대는 연기하면서 흥미롭게 느낀 장면이다. “스파이시는 여름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본 것 같아요. ‘졸려 보이세요’라는 여름의 말에 묘한 호기심을 느낀 것 아닐까요? 촬영하면서도 재밌던 기억이 커요.” 박세완과 송건희를 칭찬하던 김태훈은 “둘 다 더 어마어마해질 배우들”이라고 극찬했다. “서로 좋은 것들을 주고받은 느낌이에요. 연기하면서도, 보면서도 좋았던 장면들이에요.”
스파이시를 구현하기 위해 김태훈은 더하기보다 빼기를 택했다. 대사를 줄이고 행동을 통해 인물을 함축적으로 그려냈다. 스파이시의 내면이 건강하지 않다는 걸 납득하기 위해 온갖 이미지를 상상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처럼 등장만으로 공포감을 자아내고 싶었다”고 말을 잇던 그는 “연기는 늘 쉽지 않지만, 스파이시는 압도적으로 재밌던 인물”라며 애착을 드러냈다.
“연기를 하다 보면 표현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와요. 인물을 만드는 데 몰입하면 재미를 느끼기가 어려워지거든요. 하지만 ‘최종병기 앨리스’는 즐겁던 기억이 가장 커요. 전형적이지 않고, 만화 같아서 신선했거든요. 저는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집착이 커요. 제 연기를 관대하게 볼 수가 없더라고요. 늘 고민이에요. 그래도 이번 기회로 변신에 대한 갈증을 조금 풀었으니, 다음에는 극단적으로 유약한 인물을 맡아도 재밌겠다 싶어요. 격정 멜로나 코미디도 욕심나요. 주어진 작품에 더 잘 기여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