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든 CIA 요원들이 영등포시장 포제스모텔 605호에서 자고 있는 한 남자를 깨운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어떻게 잠든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짧은 머리에 목 뒤에 십자가 흉터, 몸은 문신으로 뒤덮인 근육질이다. 요원들이 사정을 설명하지만,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그곳에서 폭탄이 터지니 당장 탈출하라고 한다. 남자는 고민 끝에 창문으로 몸을 던진다.
넷플릭스 영화 ‘카터’는 DMZ 바이러스가 발생한 지 2달, 기억을 잃은 한 남자를 뒤쫓는다. 북한은 인구 34%인 850만명이 감염돼 국가 붕괴 위기에 빠졌다. 미국은 감염자 15만명 중 3만명이 사망했다. 한국에서 나온 생존자 1명이 유일한 희망. 대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남북한과 미국의 치열한 첩보전을 뚫고 치료제를 확보할 수 있을까.
1인칭 액션 게임을 영화로 만들면 이런 느낌일까. 영화는 카터(주원)에게 강제로 미션을 하나씩 준다. 카터는 자신의 정체성과 기억을 되찾으려면 어떻게든 미션을 성공해야 한다.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리는 카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DMZ 바이러스로 인한 복잡한 국제 정세와 암투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카터가 싸워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고 공감할 수 있게 돕는다. 액션이 끊임없이 나와도 몰입하게 하는 이유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액션 장면은 감탄을 부른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액션은 없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무술 실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액션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공간과 상황에 맞춰 최적의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쪽에 가깝다. 카터는 한 공간에 머물며 모든 인물을 제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해치우며 움직이고 내달린다. 매번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적과 싸운다. 분명 주인공이 결국 이길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마음으로 긴장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액션을 찍는 방식도 독특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앵글은 재미를 넘어 신선한 영화적 체험의 경지다. 생각지 못한 각도로 찍은 장면이 한 둘이 아니다. 롱 테이크로 찍은 장면들은 인물과의 거리를 좁히고 특유의 사실성과 긴장감을 형성한다. 목욕탕에서 시작해 차량, 오토바이, 기차, 비행기 등 상상 가능한 모든 공간에서 상상 못한 그림이 펼쳐진다. 보고 있으면 영화인지, 게임인지 혼란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전반적으로 ‘이걸 어떻게 찍었지’ 싶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걸 어떻게 했지’ 싶은 배우 주원의 활약도 만만치 않다.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하는 건, 영화 내내 같은 연기 톤을 유지하며 중심을 잡은 주원의 몫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높은 난이도의 수많은 액션을 대부분 직접 소화했다고 한다. 듣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 명의 배우가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 몸을 던지며 해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모든 인물들이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소비된다. 영화의 빠른 속도감에 인물의 매력과 사연이 휩쓸려 사라진다. 죄를 짓거나 잘못이 없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영화에서 죽거나 다친다. 인간 병기 같은 주인공 하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영화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돌아보게 한다.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급박하고 심각한 상황 설정이 살인과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 초반 목욕탕 장면에서 한 여성이 전라로 등장해 기이한 분위기를 만드는 연출은 불필요하고 불쾌하다.
5일 넷플릭스 공개. 청소년 관람 불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