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향해 치닫는 두 남자. 영화 ‘헌트’(감독 이정재)는 둘의 갈등을 비정하게 따라붙는다. 1980년대 안기부 팀장이란 직책에 맞게 숨겨진 스파이를 둘러싸고 업무적인 갈등을 그리던 영화는 욕망과 신념, 인류애 등이 뒤섞인 시대의 모습에 주목한다. 멋있게 정장을 입고 총을 들고 뛰어다니는 요원들의 액션도 눈길이 가지만, 그 뒤에 있는 인물과 시대의 이야기가 자꾸 궁금해지는 세련된 구조다. 숨 쉴 곳 찾기 힘든 긴장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신인 감독 이정재의 데뷔작, 23년 만에 한 작품에서 만난 이정재와 정우성. ‘헌트’를 보면 사전에 접했던 영화 외적인 이야기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이런 재미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신인 감독의 패기와 에너지, 능수능란하게 관객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페이스를 조절하는 원숙함이 읽힌다. 지난 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재 감독은 배우 인터뷰로 만났을 때와 달랐다. 대부분의 시간이 영화에 대한 생각과 노력, 부담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웃으며 하는 이야기보다 진지하게 설명하는 이야기가 더 길었다. 이정재 감독에게 영화 연출을 맡게 된 사연부터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고민, 주제 의식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봤다.
- ‘헌트’ 원작 시나리오를 고치느라 고심했다고 들었어요.
“처음엔 제작을 하고 싶어서 ‘남산’이란 시나리오의 판권을 구매했어요. 주제를 고치고 싶었는데 고치려면 이야기를 상당 부분 수정해야겠더라고요. 제가 생각한 주제에 맞게 잘 고쳐주실 감독님을 찾았습니다. 제 손으로 쓰는 건 엄두가 안 났거든요. 많은 감독님들을 만났고, 함께 하지 못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전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전하는 의미로 조금씩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어요. 중간에 너무 어려워서 수차례 포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자료를 더 찾고 신빙성을 위해 더블 체크, 트리플 체크하면 이 뉴스를 인물이나 상황에 잘 녹여내면 좀 더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겐 그 과정이 기댈 곳이었습니다.”
- 원작에서 어떤 점들이 바뀌었나요.
“초고에서 주제가 바뀌면서 인물 구성과 관계도가 제일 많이 바뀌었어요. 결국 이야기 전체가 바뀌었죠. 초고에선 박평호(이정재) 원톱 주인공이었어요. 조유정(고윤정)과의 관계도 잠자리를 함께하는 설정으로 돼 있었고요. 방주경(전혜진)은 박평호와 연관성이 있지만 두 장면밖에 안 나오는 인물이었습니다. 장철성(허성태)은 아예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었어요. 많은 인물이 새로 등장하면서 주제로 가는 방향과 인물의 텐션에 집중도를 더 높이려고 했어요. 그게 지금의 영화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 감독님이 생각한 주제는 어떤 것이었나요.
“근 몇 년 동안 양극화로 나뉘어 서로 분쟁하는 모습을 봤어요. 아주 어릴 때나 봤지,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현상 아닌가 생각이 들었죠. 누가 이렇게 양극화로 만들었을까 생각하며 우리의 가치관이나 신념이 누구에 의해 생성된 것 아닐까 싶었어요. 그러면서 우린 왜 이 문제로 서로 화합하지 못할까 하는 주제를 잡았어요. 그래서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군인과 북한쪽 인물을 설정하게 됐습니다. 초고는 1980년대 설정이었지만, 배경을 현대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받아들여서 현재 시대로 썼던 버전도 하나 있어요. 하지만 1980년대가 이념적으로 가장 치열했고 정보를 가공해서 재생산하는 것이 가장 심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기간에도 계속 나오는 우리 사회 뉴스를 보면서 1980년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 ‘헌트’가 완성될 때까지 몇 가지 버전의 시나리오가 있었나요.
“어제 씨네21 인터뷰를 하면서 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 노트북을 펼쳐서 직접 보여드렸어요. 큰 틀이 다른 버전만 7개 시나리오가 있어요. 그 중 하나가 1-1부터 1-11까지 가고 1-11-h까지 내려가더라고요. 중간 정도로 바뀐 건 수평으로 가고 세부적으로 다른 건 수직으로 내려가는 버전입니다. 그 정도로 많은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거죠.”
- 처음 연출에 도전하는 건 모험이자 도전이잖아요. 완성도가 낮으면 그동안 쌓아온 배우 명성에도 금이 갈 수도 있고요. 결정하기까지 생각이 많았을 것 같아요.
“사실 시대극에 액션에 해외 촬영까지 제작비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는 영화잖아요. 신인 감독에겐 허락되지 않죠. 더구나 연기자 출신 연출자에게 맡기는 건 리스크가 상당하고요. 높은 장벽을 넘으려면 시나리오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는 생각에 시나리오에 많은 시간을 매진했어요. 제게도 큰 도전이었지만, 함께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도 큰 도전이었다고 생각해요. 함께 참여해준 결정에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그 감사한 마음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 원동력은 거기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책임감이 막중했던 걸로 기억해요.”
- 그럼에도 연출에 도전한 이유가 있을까요.
“결국 주제예요.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그걸 유지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나머지는 화려한 액션이든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이든 아이디어를 고민해서 하다보면 할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과연 주제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영화의 엔딩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될까 하는 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 정우성 배우가 ‘헌트’ 출연 제안을 세 번이나 거절한 걸로 알려졌어요.
“영화 ‘태양은 없다’(감독 김성수) 이후 저와 우성씨가 같이 출연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세 번 정도 있었어요. 작업을 같이 하고 싶어서 프로젝트를 찾았고 만드는 시도도 해봤지만 잘되지 않았어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난제더라고요. ‘남산’ 초고를 처음 접했을 때 우성씨와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어요. 우성씨는 제가 연출만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우리가 함께 출연하는 것도 하나의 숙제고 그걸 한방에 다 해결하겠다는 건 너무 욕심 아니냐고 했어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감독님들을 만난 거예요.”
- 그럼 결국 정우성 배우는 마지막에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모든 배우와 스태프는 시나리오로 선택받아야 해요. 사실 저희가 워낙 친분이 있눈 걸 많은 분들이 아시잖아요. 그러다보니 시나리오와 프로젝트가 미흡해도 친하니까 그냥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흰 절대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우성 씨가 3~4번 거절했고 어렵게 캐스팅했다고 알리고 싶었어요. 일하는 데 있어선 굉장히 치밀하고 치열하고 프로 근성이 있어요. 친하고 안 친한 걸로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 혹시 연출을 꿈꾸는 배우들에게 해줄 얘기가 있나요.
“저도 연출하는데요 뭐. ‘헌트’ VIP 시사회 때도 이제 당신 차례라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상을 받아서 축하 문자가 오면 ‘고마워, 이제 당신 차례야’, 연출이 나쁘지 않았다고 하면 ‘어, 당신 차례야’라고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연기자가 무슨 연출이야, 연출자가 무슨 제작이야 하는 얘기가 많았거든요. 지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잖아요. 제가 잘 나서, 제가 잘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중요한 희망이자 용기인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용기내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에게 격려와 응원해주는 문화가 확산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게 제 나이에서 할 수 있는 얘기 같아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