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월 1일 백범 김구(1876~1949)의 부인 최준례(1889~1924)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에서 사망했다. 아들 김신(1922~2016·독립운동가⋅공군참모총장)을 낳고 폐렴으로 고생하다 낙상에 따른 후유증을 이기지 못했다.
그때 김구 스스로 밝혔듯 “독립운동 하다가 목숨 잃고 집안 망하는(殺身亡家·살신망가) 동포들이 매일 수십 수백이란 비참한 소식을 듣는다” 했는데 남 얘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김구는 당시 말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이지 끼니를 걱정하는 망명가 신세였다. 그러니 그의 부인 최준례의 고생이야 말해 무엇하랴.
부부는 1904년 결혼해 1906년 첫째 딸을 낳았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둘째 딸 화경(1910~1915)과 셋째 딸 은경(1916~1917) 역시 너무나 일찍 잃었다. 김구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최준례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세월이었다.
그 딸 셋을 연이어 잃는 기간, 김구는 신교육운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하다 결국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다. 안악사건은 안중근 의사 사촌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김구 등 황해도 애국지사들을 접촉한 것을 일제가 빌미삼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로 날조, 160여 명을 검거했다.
김구는 결국 서대문감옥과 인천감옥에서 형을 살다 메이지(明治)천황의 처가 죽어 그 특사로 1915년 출옥했다. 1896~1898년 소위 ‘치하포 사건’으로 첫 감옥 생활을 한 뒤 두 번째 수감생활이었다.
김구는 1898년 인천감옥을 탈옥해 삼남지방을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정진하다가 1899년 환속, 본향 황해도 해주로 돌아왔었다.
특사 출옥한 뒤 김구는 교육을 통한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1919년 9월 상해로 망명했다. 1920년 김구는 아내와 큰아들 김인(1918~1945·독립운동가)을, 그 이듬해에는 어머니 곽낙원(1859~1939·독립운동가) 여사를 상해로 모셨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긴장의 망명 생활이 이역만리에서 계속됐다. 최준례는 망명 이듬해 차남 신을 출산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어느 하루도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었다. 무엇보다 생계가 막막했다. 굶기 일쑤였다. 어미가 먹는 게 부실하니 젖이 모자랐고 갓난아기에게 먹일 수 없었다. 오죽하면 시어머니의 공갈 젖을 물렸겠는가.
사실 최준례는 근대문명 세례를 듬뿍 받고 자란 세련된 신여성이었다. 김구 눈에는 사랑스런 철부지였고, 최준례 눈엔 김구가 ‘옛날 사람’이었다. 얼굴에 곰보 자국 있는 우락부락한 김구와 열세 살 어린 낭랑한 규수와의 인연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의사 사위 떠받든 김구 장모
부부가 연을 맺게 된 것은 김구의 신앙생활과 맞물려 있다. 노총각이었던 김구가 첫사랑의 약혼자 여옥(1903년 사망)을 잃던 무렵 야소교에 입문했다. “애국 사상을 지닌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을 알고 있던 차에 우종서 전도조사의 권유에 신봉하게 됐다”고 백범일지에 밝혔다. 딸 여옥을 잃고 시름에 잠긴 그의 어머니마저 전도한 김구였다.
그렇게 기독교인이 된 김구는 기독교교육운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오직 배움만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때 김구는 고향 해주를 떠나 황해도 기독교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황해도 장련으로 이사, 백남훈(1885~1967·교육가⋅정치가) 방기창(1851~1911·목사⋅기독교 지도자) 등과 교육운동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와 교제를 하나 사실상 혼인 거부를 당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프란체스카와 만나기 전 미국 유학 온 임영신(중앙대 설립자)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한 경우와 비슷하다. 당시 이승만은 기혼자였다.
연애에 실패한 김구는 열정적인 신앙생활과 교육 및 사회운동에만 몰입했다. 결혼에 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황해도 신천 사평동 교회의 영수(장로 격) 양성칙이 그 교회 주일학교 여학생 최준례가 어떠냐며 중매에 나섰다. 준례는 과부 김 부인의 둘째 딸이었다. 김 부인의 사위 신창희는 서울 제중의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전신)를 졸업한 의사였다. 그런 신창희가 신천에 병원을 개업하면서 경성 사람이었던 김 부인도 사위 따라 신천에 정착한 것이다.
김 부인은 두 딸이 어릴 때 제중원 직원으로 근무하며 원내에서 살았다. 제중원은 의료선교사 알렌이 세운 병원이었다. 김 부인과 두 딸은 기독교 근대문명의 중심에서 살아가던 특별한 조선 사람이었다. 제중원은 지금의 을지로입구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터였고 준례는 여덟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니 김 부인의 입장에서 김구와 준례의 결혼은 상당히 기운다고 생각했다. 맏사위가 의사인데 김구는 스스로 고백했듯 '상놈'이었다. 애초 김 부인은 반듯한 교회 청년 강성모를 사위로 삼으려 했다. 강성모도 준례를 너무나 좋아했다. 하지만 딸 준례가 말을 듣지 않았다.
김 부인은 황해도 지역 미국 북장로회 파송 조선선교사 에스윈 쿤스(한국명 군예빈·1880~1947·서울 경신학교 교장)와 윌리엄 헌트(한위렴·1869~1953·조선 서북지방 교육운동가)를 등에 업고 김구를 내쳤다. 당시 선교사의 결정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준례는 부모가 정해준 결혼에 대해 따를 수 없다고 했고, 김구도 자유 결혼을 주창했다. 하지만 교회 측은 신앙생활에 대한 검증이 덜 된 김구를 미더워 하지 않았다. 쿤스와 헌트는 교회법에 따라 두 연인의 책벌을 결정했다. 강성모의 고발에 따른 것이었다.
‘백범일지’에 “교회에서 나에게 (준례와의 결혼을) 그만두도록 권고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며 “그럼에도 나는 준례를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서울 정신여고 전신)에 유학 보냈다”라고 적었다.
김구는 자유연애를 죄악시하고 조혼을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인데 진보한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따졌다. 이에 쿤스는 혼례서를 작성해 주고 책벌을 해제했다.
그렇게 김구는 '철부지' 신여성 최준례와 1904년 12월 혼인을 했다. 어렵게 노총각 신세를 면했던 것이다. 김구는 신식 장모와 처형, 동서에게 누구보다 잘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처가쪽 마음에 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특유의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 김구는 결혼 이듬해 평안남도 개항도시 진남포의 기독교단체 엡윗청년회 총무가 된다.
어린 신부 친정 나들이 잦아지면서...
엡윗(懿法=의법)청년회는 1897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기독교 청년단체로 사회·항일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다. 그런 엡윗청년회 총무가 됐다는 것은 조선의 열혈 청년 김구를 성장시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혼돈의 국제정세를 파악해 가는 창구였던 셈이다. ‘엡윗’은 감리회를 창시한 영국 출신 존 웨슬리의 고향 지명이다.
또 김구에게 기독교 배경의 최준례와의 결혼은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 나아가 미군정과의 관계, 이승만·여운형과의 관계 설정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반면 ‘상남자(남자 중의 남자)’ 김구를 남편으로 맞은 어린 신부 최준례로서는 사랑만 믿고 결혼한 자신의 선택 때문에 고생문이 훤히 열리는 걸 꿈에도 몰랐다.
집안일은 나몰라라 하고 신교육입네, 구국운동입네 하고 고향 황해도 일대와 평양·경성을 오르내리는 남편이 결코 고울 리 없었다.
당장 어린 신부의 친정 나들이가 잦아졌다. 세련된 의사 부인 언니와 듬직한 형부, 의사 사위를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는 어머니에게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토로하곤 했다. 더구나 곽낙원 여사가 어디 보통 시어머니인가?<중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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