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헌병보조원 첩이 된 처형 등 '처가 월드'에 절레절레

김구, 헌병보조원 첩이 된 처형 등 '처가 월드'에 절레절레

[전정희 편집위원의 러브& 히스토리칼 사이트] 김구 최준례 부부 (中)
두 딸 죽고, 남편 옥바라지...아내 고생을 몰랐던 '옛날 사람' 김구

기사승인 2022-09-04 09:01:01
“큰 딸을 데리고 나가주지 못할 터이면 작은 딸까지 데리고 나가달라.”

‘상남자’ 백범 김구(1876~1949)도 아내 앞에선 평범한 지아비였다. 어머니 말씀에 꼼짝 못했고 처가 식구 눈치 보며 살았다.

어느 날 아내와 처가의 태도에 열불이 난 김구가 장모 ‘김 부인’에게 조심스럽지만 강하게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큰 딸은 처형이고 작은 딸은 아내 최준례(1889~1924)이다.

백범 김구·최준례 부부. 망명지 중국 상해 시절이다. 가운데는 큰 아들 김인이다. 
앞서 얘기했듯('상남자' 김구, 열 세 살 어린 아내의 '고단한 순정'편 참조) 자신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처자와 1904년 결혼한 김구는 ‘도둑놈’ 소리 듣기 딱 좋았다. ‘김 부인’은 젊어 경성 ‘제중원’이라는 최신식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또 사위가 제중원의학교(훗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였으니 그 위세가 당당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제중원 내에 살며 경성 번화가 혼마치(지금의 서울 명동과 충무로 일대)의 문화를 누리고 산 최준례에게 나이 많은 신랑 김구는 ‘옛날 사람’이었다. 장서 갈등도 황해도 해주 ‘상놈’ 김구와 격이 다른 데서 오는 문화 갈등 요소가 컸다.

그렇다고 부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최준례는 가정을 등한하고 신교육운동과 독립운동 등으로 일경에 쫓겨 다니다 감옥 까지 간 남편을 끝까지 따르고 존경했다.

김구는 지독한 효자였다. 어머니 곽낙원(1859~1939·독립운동가) 말만 나와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사람이었다. ‘백범일지’의 많은 부분이 어머니에 대한 간절함을 담고 있다.


장서 갈등에 김구 특단 결심

‘어머님이 손수 담은 밥그릇을 열고 밥을 먹으면서 생각하니 어머님의 눈물이 이 밥에 점점이 섞이었을 것이다. 18년 전 해주 옥바라지로부터 인천의 옥바라지 하실 때까지는 슬프고 황망한 중에도 내외분이 서로 위로하고 의논하시며 지냈으나 지금은 과부의 몸으로 어느 누구하나 살뜰하게 위로하여 줄 사람도 없다’(백범일지 중·도진순 주해본)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도 마다하지 않는 전형적 한국 어머니 곽낙원에게 신식 사돈과 신여성 며느리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김구가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으로 호소했다.

“(어머님,) 장모나 처형이 비록 여자 도리에 위반되는 죄상이 있다하더라도 죄가 없는 아내까지 내쫓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용서하십시오.”

곽낙원 여사가 화가 난 것은 며느리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뻑 하면 친정에 가곤 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자기 모친이 얹혀사는 처형 집에 갔다는 소식에 무한의 느낌이 생긴다.’(백범일지 중)

‘무한’ 즉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각이 든다’라고 완곡히 아내를 탓한 대목이다. ‘백범일지’ 상권이 1929년 저술된 것이니 많이 정제된 표현이었을 것이다. 한국사의 위인일지라도 아내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거나 아니면 순응하고 작아질 수밖에 없다.

황해도 안악 광진학교 교사 시절의 김구(맨 뒷줄 오른쪽). 해서교육총감으로 순회 교사를 하던 때이다. 왼쪽 위로 '예배당'이란 현판이 보인다. 
제중원 의사 사위 얻은 ‘김 부인’도 김구를 마뜩찮아 했다. 가정 돌보지 않고 싸돌아 다니기 때문이었다. 당시 진보단체 진남포엡윗청년회 총무에, 황해도 민족학교 종산학교 선생질에, 일제가 감시하는 순회교육운동에, 나아가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전덕기 이상설 김홍량 도인권 안명근 등 소위 ‘불령선인’ 등과 독립 운운하고 다니니 딸 팔자가 심히 염려될 밖에…

김구의 손위 동서 신창희는 제중의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신천에 개업의가 됐다. 김구도 결혼하고 신천 등에서 살았다. 한데 큰 사위를 따라온 장모와 세 모녀가 한 통속이었다. 곽낙원 여사가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러던 차에 신창희가 심화된 과정을 밟기 위해 제중원 후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 도로 경성으로 가게 됐다. 처형과 장모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사는 황해도 장련읍 김구 부부 집에 장모와 처형이 찾아왔다. 평양 구경을 하고 들렀다는 것인데 김구가 세 모녀 수다를 듣자니 처형 부부가 갈등을 겪는 듯 했다.

‘처형은 신창희 군과 잘 맞지 않고 어긋난 빛을 보일 뿐만 아니라 거동이 상식에 벗어난 경향을 보였다. 하물며 기독신자로서 행위인지라 그것을 본 나의 부부는 처형과 장모를 권하여 신창희에게로 보냈다.’(백범일지 중)

그럼에도 처형 부부는 끝내 파국을 맞았다. ‘나와 어머님은 한때도 용납할 생각이 없었으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와 언니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 가정은 심히 불안에 빠졌다.’

결국 김구가 나서 장모에게 자신의 집에서 “작은 딸(최준례)까지 데리고 나가 달라”며 에둘러 권했다. 눈치 없는 장모와 아내가 좋아라 하며 냉큼 경성으로 가버렸다. 당황한 건 김구였다.

“이게 아닌데….”


'시월드'에 힘들어 하는 어린 아내

김구는 경성으로 쫓아올라갔다. 그리고 아내를 데려와 황해도 재령의 쿤스 목사집에 머물게 했다. 여기서도 ‘효자 본능’이 나타난다.

“어머님, 장모나 처형이 비록 여자의 도리에 위반되는 죄상이 있더라도 죄가 없는 아내까지 내쫓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용서하십시오.”

아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곽낙원 여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데려오는 것보다 내가 (재령에 가서) 직접 가서 데려오마.” 어쨌든 최준례에게는 ‘시월드’였다. 김구의 처가 문제는 최준례가 ‘친모와 친형에 대한 친족 관념을 단절’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김구로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문제의 처형이 ‘황해도 평산 등지에서 헌병보조원의 처인지 첩인지가 되어 살고, 장모도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억센 동아줄은 끊어도 혈연은 끊지 못하는 법이다. 1911년 1월 김구가 안중근 사촌동생 안명근 등을 접촉하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혐의로 경성 종로구치감을 거쳐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어머니와 아내가 옥바라지를 위해 딸 화경을 평산 처형 집에 맡기고 면회를 다녔다.

‘…아내도 자기 언니가 헌병의 첩질 한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영구히 만나지 않기로 결심하였건만, 내가 이 지경이 되니 하는 수 없이 찾아갔을 것이다.’

고부갈등은 옥바라지 과정에서 풀렸다. ‘상남자’ 김구 눈에 어린 아내가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1910년 말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혐의를 씌워 김구 등 황해도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한 '안악사건' 관련자들이 용수를 쓴 채 재판정에 불려나가는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김구는 경성재판소에서 15년 형을 받는다.  
김구는 소위 안명근과 관련된 ‘안악사건’으로 15년 형을 받았다. 안악사건은 ‘105인 사건’ 또는 ‘신민회사건’으로 불리는 일제에 의한 독립운동가 세력 소탕 작전이었다. 경술국치(1910) 직후 저항하면 이 꼴 된다는 식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일제의 간악한 음모였다.

김구는 모진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 죄수번호 56호가 됐다. 의병과 활빈당 간부 등과 합방되어 수감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1912년 7월 조선의 원수 메이지 천황이 죽자 대사면으로 7년으로 감형됐다. 이어 그해 메이지의 처도 죽었다. 5년으로 감형됐다.

1915년 8월. 인천감옥에서 김구가 출옥했다. 1박2일이 걸려 황해도 안악 집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인파가 그를 반겼다. 김구는 출옥 전 죽은 둘째 딸 화경(1910~1915)이 묻힌 공동묘지를 먼저 다녀왔다. 그리고 출옥 환영회가 준비된 안악 안신학교에 들렀을 때 비로소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남편 출옥 환영회 음식 준비 때문에 신작로까지 나가 남편을 맞이할 수 없었던 ‘조선의 아내’ 최준례였다. 최준례는 당시 민족학교인 안신학교 교사이기도 했다.


김구,며느리 편 드는 모친에 "어리둥절"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 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운다. 가만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으로 호령하신다.’

출옥 후 김구가 말한 가정사의 새로운 변화다. 출옥한 김구에게는 ‘상남자’답게 늘 사람이 들끓었다. 출옥 위로회니 뭐니 해서 허구헌날 술판이었다. 어느 날 기생첩을 끼고 술을 마시는데 접대 받는 장소가 하필 안신학교 옆이라 풍악소리가 최준례의 귀에 안 들어 갈 리 없다.

곽낙원 여사가 노발대발했다. “(네 처는 생활비가 떨어져) 화경이를 내게 맡기고 매일 왜놈 토지국의 인쇄공장에서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생각지 못하였더란 말이냐.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사돈 간의 불화도 며느리의 자세 때문인지 해소됐다.

“…네 장모도 전보다 너를 더욱 애중해 하니 곧 통지하여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곽낙원 여사와 아내 최준례가 번갈아 옥바라지를 했고 의외로 장모 ‘김 부인’도 자주 왔다. 그때마다 김구는 처형 문제 관계로 자신이 장모에게 너무 박하게 군 것 아닌가 후회했다.

김구는 어머니 말대로 통지하여 장모에게 출옥 사실을 알렸다. 사위의 편지에 화색한 장모와 처형이 안악 부부의 집으로 냉큼 들어왔다. 김구는 또 한 번 당혹스러웠다. 그 문제의 처형이 헌병보조원에게 첩의 자리마저도 버림 받고 폐렴에 걸려 생활이 빈궁하던 차였다.

‘전과 같이 헌병보조원 첩이라면 문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터이나 죽을병이 들어 자기 동생 집으로 오는 것이니 미움보다 연민이 느껴져 다 같이 살았다.’(백범일지 중)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첫 감옥생활을 했던 '인천감리서'. '안악사건'으로 두 번째 수감됐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어 이곳 인천감리서(인천감옥)로 다시 오게 된다.
김구가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만 4년 6개월의 감옥 생활하고 출옥한 1915년 8월부터 중국 상해로 망명한 1919년 3월 29일까지가 어쩌면 이 가정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남편의 감옥 생활 4년 6개월. 시어머니와 함께 황해도에서 서대문·인천 감옥을 오가며 옥바라지를 하던 최준례, 그는 언니가 헌병보조원 첩으로 들어가자 연을 끊고 살면서도 그래도 피붙이인지라 옥바라지 갈 때면 자신의 어린 딸을 언니에게 맡기곤 했다.

그 인고의 세월을 보내니 하늘의 은혜로 남편이 15년에서 5년으로 감형되어 출옥했고, 남편도 친정 식구들의 허물을 감싸 안았다.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남편 4형제 모두가 단명했고 그 조카들도 그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사를 이을 유일한 손이 김구였다.

그러니 열여섯 어린 신부였던 최준례도 나이가 들면서 시어머니를 이해했다. 그러던 차에 남편이 출옥해 친정 식구들이 금과옥조로 삼았던 기독교 신앙을 섬기고, 자신이 근무하는 안신학교에서 어린이들도 가르치니 이처럼 꿈 같은 세월이 있었겠는가.

더구나 남편은 황해도 대지주이자 민족자본가 김홍량(1885~1950·교육운동가)의 안악 동산평과 문화의 궁궁농장의 농감 등을 하며 성실하게 돈도 벌었다.

그렇게 행복했던 부부에게 감사하게도 또 아이가 생겼다. 시어머니는 “이번에는 꼭 아들을 주십사”하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하편으로 이어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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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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