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총리·대통령도 “역대급 태풍”...최상급 비표준어에 겁먹다

언론·총리·대통령도 “역대급 태풍”...최상급 비표준어에 겁먹다

[ MZ세대를 위한 시사 漢字 이해 ] 역대급(歷代級)
유행어, 신조어를 마구 사용하는 사회 지도층
메시지 전달과 공신력...표준은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약속

기사승인 2022-09-06 10:31:21
한덕수 국무총리는 5일 북상 중인 제11호 태풍 ‘힌남노’와 관련해 “이번 태풍이 경험해보지 못한 역대급 태풍이 될 수도 있다는 기상청 예보가 있었다”며 “국민 여러분께서도 태풍으로부터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강조했다.

한 총리는 이날 정부 서울청사에서 관련 점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힌남노’는 매우 강한 세력을 유지한 채 오늘 밤부터 제주도 부근을 지나 내일 이른 아침에는 경남 남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한 총리는 “국민 여러분께서는 최신 기상정보에 계속 귀 기울여 주시고, 저지대 사전 대피, 위험지역 방문 자제 등 행동 요령을 꼭 지켜주시기 바란다”며 “정부·지자체 등 방재당국의 조치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출전 동아닷컴)

지난 3일 저녁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상황실 서울상황센터에서 태풍 ‘힌남노’ 대비상황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한덕수 총리. 사진=연합뉴스
□ 역대급: 지나간(歷) 시대(代)에 준하는(級)?...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신조어일 뿐

태풍 ‘힌남노’ 발생 후 우리나라 언론 등이 ‘유례가 없는 강력한 태풍’임을 시사하는 ‘역대급’이란 유행어(신조어)를 통해 위기 상황을 강조했습니다. 국민은 그 강력한 언어의 힘에 대비를 넘어 불안에 시달렸죠.

‘역대급(歷代級)’은 2010년 무렵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사용된 신조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마치 표준어인냥 우리 생활 깊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신조어는 성적인 욕 ‘X라’가 생활 언어로 마구 쓰이는 것과 같이 생명력이 깁니다. 이리 길다보면 표준어로 자리 잡을 수도 있습니다. 언어라는 게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속성이 있어 ‘존재’를 마냥 부인할 수만은 없거든요.

'역대급'은 ‘역대급 미모’ ‘역대급 동안’ ‘역대급 추위’ ‘역대급 드라마’ ‘역대급 스펙’ 등 아무데나 갖다 붙여도 역대 최고나 역대 최저를 나타내고자 하는 말로 쓰입니다. 예를 들면 ‘역대급 미모’라고 했을 때 ‘역대 최고의 미모’라는 얘긴가요, 아니면 ‘역대 최저의 미모’라는 얘긴가요?

뉘앙스는 분명 ‘역대 최고의 미모’입니다. 하지만 문법적으로는 오류가 있습니다. 일단 역대(歷代)가 ‘대대로 내려온 여러 대’ 또는 ‘그 동안’입니다. 여기에 ‘그에 준한다’는 접미사 '급(級)'을 붙인 거죠.

그러면 ‘역대급(歷代級)’이란 조어를 풀자면 ‘그 동안에 그에 준하는’는 인가요?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담은 말이 아닌 셈이죠. 하지만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데도 메시지는 전달이 됩니다. ‘그 동안에 못 본 미모’를 넘어 ‘역사상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미모’를 표현한 걸로 말이죠.

국무총리와 대통령이 각기 담화와 약식회견을 통해 ‘역대급 태풍’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습니다. 이를 풀이하자면 “역사상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강력한 태풍”이라고 해야겠지요. 총리와 대통령이 그러니 겁먹지 않을 수 없죠. 물론 국민 여러분이 태풍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전의 대비를 하라는 말씀인 건 압니다.

하지만 언론, 공기관, 총리와 대통령까지도 선동성 강한 비표준어를 남발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속어를 남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 사용의 품위를 지켜야 하는 사회 지도층은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말은 영향력과 파급력이 있기 때문이죠. 지도층이 비속어 ‘X라’ 등을 남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사회에는 ‘표준’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표준에는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약속’이 담겨 있어요. 지도층의 언어가 선동의 언어가 되어선 안 됩니다. 총리와 대통령의 입에서 ‘역대급 태풍’이라는 최상급 신조어가 나왔는데 정작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태풍은 아니었잖아요.

지도자의 말이 허언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공신력이 없어지는 겁니다. ‘힌남노’보다 더 강력한 태풍이 불어 닥친다면 또 어떻게 얘기할지 궁금합니다.

‘초역대급 태풍’ ‘초초역대급 태풍’ ‘메가톤급 태풍’?

언론, 공기관, 지도자들은 이번 기회에 반성해야 합니다. 표준을 지켜야 합니다. 표준은 곧 모범이기도 하고요. 그래야 공신력이 생깁니다.

歷 : 지낼 역

代 : 대신할 대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