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엔 믿지 않았을 말들 [‘오징어 게임’ 1년 후①]

1년 전엔 믿지 않았을 말들 [‘오징어 게임’ 1년 후①]

기사승인 2022-09-17 06:01:02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스틸컷. 넷플릭스

1년 전, 누군가가 “한국 드라마가 미국 에미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면 몇 명이나 그 말을 믿었을까. 아무리 한국 영화가 칸영화제, 아카데미를 휩쓸고, 아이돌 그룹이 빌보드 1위에 올라도, 드라마는 다른 영역이었다. 집에서 편안하게 긴 시간 시청하는 드라마는 영화나 음악보다 영어와 비영어 장벽이 더 높다. 여태까지 영어가 아닌 작품이 한 번도 에미상에 지명되거나 수상하지 못한 사실이 그 증거다. 지난해 9월17일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나타나기 전 이야기다.

‘오징어 게임’은 고작 1년 만에 이전엔 생각지 못한 일들을 이뤄냈다. 과거에 들었으면 불가능한 예언이라 생각했을 결과를 연이어 만들어냈다. ‘오징어 게임’이 만든 몇몇 성과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봤다.
 
지난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등장한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역대 넷플릭스 1위가 한국 드라마”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지 일주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국내 시청자들이 ‘전 세계 1위’ 개념을 이해하는 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 드라마가 미국에서 1위를 기록한 사실도 신기한데 전 세계라니. 넷플릭스를 서비스하는 대부분 국가 인기 넷플릭스 순위에 ‘오징어 게임’이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공개 전까지 국내에서 과연 잘 될지 확신하기 어려운 작품이 만들어낸 성과다.

잠깐 그러다 말겠지. 아니었다. 각 국가에서 기록한 순위로 점수를 매겨 전 세계 1위 작품을 가리는 온라인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은 53일 동안 전 세계 넷플릭스 1위 자리를 지켰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장 1위 기록이다.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공개 후 28일 간 전 세계에서 16억5045만 시간을 시청해 역대 시청 시간 1위라고 발표했다. 2위인 ‘기묘한 이야기’ 시즌4가 기록한 13억5209만 시간과 차이도 크다. 그렇게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넷플릭스 작품이 됐다.

→ ‘오징어 게임’을 시작으로 ‘전 세계 1위’는 한국 드라마 흥행을 가르는 기준이 됐다.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이 전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기준이 높아진 덕분에, 이제 국내 작품이 넷플릭스 비영어권 1위를 기록하는 것으론 큰 화제를 모으지 못한다.

(왼쪽부터) 에릭 가세티 LA 시장, 김지연 사이렌 픽처스 대표, 황동혁 감독, 배우 이정재, 존 리 LA 시의원(12지구). LA 시의회

“미국에서 한국 드라마 기념일 제정”

시즌2가 나온다. 지난 6월 황동혁 감독은 “새로운 게임이 시작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공개해 ‘오징어 게임’ 시즌2 제작 소식을 알렸다. 역대 1위를 기록한 작품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작품에게 시즌2 제작 기회가 오는 건 아니다. 넷플릭스는 데이터에 근거해 일부 작품만 다음 시즌을 이어가고, 인기가 줄어들면 과감히 시즌을 중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넷플릭스가 한국에서 처음 제작한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외에 다음 시즌으로 이어지는 드라마가 거의 없던 흐름을 ‘오징어 게임’이 깼다. ‘오징어 게임’ 이후 ‘스위트홈’, ‘D.P.’,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이 시즌2 제작을 확정했다.

국내 시청자보다 해외 시청자 반응이 더 뜨겁다. 공개 후 28일 간 ‘오징어 게임’을 본 시청자의 95%가 외국인이었다. 한국관광공사 뉴욕지사와 미시간 주립대학교 김미란 교수 공동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 60%가 ‘오징어 게임’을 봤고, 이중 90%가 시즌2를 볼 계획이라고 했다. ‘오징어 게임’ 속 인물들이 입는 초록색 트레이닝복과 핑크색 유니폼은 해외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이 됐다. 드라마 속 게임으로 등장하는 달고나와 딱지치기가 유행해, 해외 길거리 곳곳에서 외국인들이 딱지를 치는 모습이 목격됐다. 미국에선 ‘오징어 게임의 날’까지 만들어졌다. 지난 9일 LA 시의회는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9월17일을 매년 ‘오징어 게임의 날’로 선포했다.

→ 해외 시청자들에게 한국 드라마가 인기라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넷플릭스 외에도 국내 OTT들이 해외 OTT와 계약을 맺으며 세계 곳곳으로 한국 드라마를 서비스하고 있다. 어쩌면 ‘오징어 게임’ 시즌2는 한국 시청자를 위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이정재. AP 연합뉴스

“한국 배우가 ‘스타워즈’ 주인공”

미국 드라마 시상식 후보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열린 제31회 고담 어워즈에서 ‘오징어 게임’의 배우 이정재는 새로 신설된 신작 시리즈 부문 최고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직접 미국 뉴욕에서 열린 시상식까지 갔지만, 수상엔 실패했다. 이정재는 지난 1월 제79회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상을 받지 못한 건 아쉽지만, 후보 지명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그때까진 그랬다.

배우 오영수가 비영어권에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영수는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란 소감으로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지난 2월 열린 미국배우조합(SAG)상 시상식에선 이정재가 남우주연상, 정호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거기에 ‘오징어 게임’ 배우들은 TV 드라마 스턴트 부문 앙상블상까지 받았다. 시상식에서 가장 중요한 상을 휩쓸었다. 모든 게 한국 드라마 최초였다. 이정재는 지난 3월 미국 크리틱스초이스(CCA) 시상식에서 TV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였다. 점점 최초 수상이 익숙해졌다.

이젠 거꾸로 세계가 주목한다. 지난 9일 이정재가 ‘스타워즈’ 시리즈 ‘애콜라이트’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구체적인 역할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가장 미국적인 콘텐츠로 손꼽히는 ‘스타워즈’에 한국 배우가 주인공을 맡는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배우로 데뷔한 정호연에겐 영화 ‘그래비티’, ‘로마’를 연출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정호연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연출하는 애플TV+ 새 시리즈 ‘디스클레이머’에서 배우 케이트 블란쳇과 호흡을 맞춘다. 조 탈보트 감독이 연출하는 ‘더 가버니스’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등 할리우드에서 배우 활동을 이어간다.

→ 이제 한국 배우들이 마블 시리즈나 ‘스타워즈’ 시리즈에 캐스팅 되는 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동석이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 출연한 것에 이어, 박서준도 ‘캡틴 마블’ 속편인 ‘더 마블스’에 출연한다. 오영수처럼 시상식 뒷풀이에서 대단한 춤을 선보여야 주목 받는다.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으로 감독상을 받은 황동혁 감독.   사진=임형택 기자

“한국 드라마가 에미상 수상”

미국 드라마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11월 제31회 고담 어워즈에서 ‘오징어 게임’이 최우수 장편 시리즈상을 수상한 직후 김지연 싸이런픽쳐스 대표와 황동혁 감독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건 기적이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한국 드라마가 미국 드라마 시상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줄 몰랐던 것이다. 기적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한 달 후 제47회 피플스 초이스 어워즈에선 올해의 정주행 시리즈 부문에서 최고의 정주행상을 받았고, 지난 2월 제27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에서 최우수 외국어 시리즈상, 제2회 크리틱스 초이스 슈퍼 어워즈에선 액션 시리즈 부문 작품상을 손에 쥐었다.

모두 에미상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 ‘오징어 게임’은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13개 부문에 14개 후보를 올렸다. 1949년 에미상이 처음 개최된 이후 비영어권 드라마가 후보에 오른 건 처음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LA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감독상, 이정재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본상 외에도 배우 이유미가 여우게스트상을 받고 현대극 미술상과 싱글에피소드 특수시각효과상, 스턴트 퍼포먼스상까지 모두 6개 트로피를 가져왔다. 그렇게 ‘오징어 게임’은 에미상의 장벽을 넘은 첫 한국 드라마, 첫 아시아 드라마, 첫 비영어권 드라마로 기록됐다. 시상식 무대에 오른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을 받는 마지막 한국 드라마가 아니길 바란다”로 말했다.

→ 이제 한국 배우와 감독이 유명 외국 배우, 감독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모습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이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여한 직후 한국 배우들에게 외국 배우들을 만난 소감을 물었지만, 이제 아무도 이정재에게 그런 걸 묻지 않는다. 거꾸로 이젠 외국 배우들에게 이정재를 만난 소감을 묻지 않을까.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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