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3월.
이곳 목천포에서 연이은 떼강도 사건이 발생한다. 그 피해자 중 한 명이 서양 의사 포사이드(한국명 보위렴·1873~1918)였다. 1904년 8월 초 고국 미국 뉴욕을 떠나 9월 29일 미국남장로회 전주선교부에 도착한 의료선교사였다. 우리땅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포사이드는 호남의 큰 고을 전주에서 전염병 환자와 '문둥병'(한센병)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근대 의술이 보급되지 않은 조선은 무당과 전통 한의학에 기댄 주술적 방식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양 의사들에게도 조선에서 의술을 펼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미션이었다. 풍토병과 습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은 그들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초기 서양 의사들은 병들고 약한 자를 돌보라는 예수의 박애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조선으로 향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포사이드는 전주진료소(현 예수병원)에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었다.
당시 목천포 당뫼(지금의 ‘만경강문화관’ 자리 추정)에 이경호라는 전주 이씨 양반이 있었다. 그런데 이경호가 강도를 당해 상해를 입었다. 포사이드는 왕진에 나서 그를 치료했으나 날이 저물고 말았다.
별수 없이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떼강도가 들이닥쳐 이경호 집을 약탈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강도들은 포사이드가 잠을 자기 위해 벽에 걸어 놓은 옷을 보고 경관으로 오인, 군도를 휘두른 것이다.
포사이드는 귀가 잘리고 두개골이 깨졌다. 얼굴과 목에도 자상을 입었다. 그는 군산 구암진료소를 거쳐 전주진료소로 후송됐고 다시 큰 병원인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집중 치료를 받았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포사이드는 미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루이빌의대를 졸업하고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중 군의관으로 쿠바에 파견되기도 했다. 그는 군의관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병’(문둥병으로도 불린다. 정식 명칭은 '한센병'이다)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뉴욕여자병원 수련의로 근무하면서 빈민가 환자를 돌봤다. 전쟁 중에 겪은 생명에 대한 존중, 빈민가 봉사를 통한 병마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미국남장로회가 전주선교부 진료소 책임자를 찾고 있자 조선행을 결심했다. 그는 부임 직후 조선어 학습과 군산·목포 등의 진료소 순회를 겸했다.
한편 그가 치료해준 이경호의 서자 이보한(1872~1931)이 아버지 대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이보한을 두고 ‘거지 대장 이거두리’라고 불렀다. 그의 묘비엔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위해 옷을 벗어 주고 밥을 주네’라고 되어 있다. 시각장애인 영성가이자 3·1 만세운동을 이끈 애국자였다.
포사이드가 강도당한 그 무렵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였다. 민씨 척족 권력과 친일파들의 부패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가뭄과 홍수, 전염병과 수탈 등으로 유랑자가 속출했다.
‘(공주에서는) 거지 소년들이 숲속에서 썩은 개고기를 구워 먹고, (전염병에 걸려 죽은) 아이들의 시신 여덟 구가 나무에 주물(呪物)처럼 달려있다.…공주 감옥에선 간수가 죄수들이 더 많이 들어오게 해 달라고 고사를 지내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죄수들에게 자기들이 곡식을 팔 수 있다고 한다…’(1904년 3월 31일 조선 파송 여선교사 ‘노블일기’ 중에서)
더구나 1904년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장인 평양을 중심으로 발병한 콜레라가 남하, 하루에도 수천 명이 산 채로 들판에 격리되거나 버려졌다. 강도와 도적 떼도 곳곳에서 출몰했다.
한편 중상을 입어 본국으로 후송된 포사이드는 어찌 됐을까. 무엇보다 그는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용서한다고 했다. 그리고 1909년 불완전한 몸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목천포에서의 끔찍한 사건을 잊고 전주·군산·목포 등 호남 지방의 의료 구제에 열중하여 주요 거점의 진료소를 근대 병원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대개가 무료 진료였다. <다음 회로 이어짐 : 10월 11일 오전 6시 발행>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