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학교 밖에 못 나온 가난한 화가 박수근과 춘천여고를 졸업한 부잣집 신여성 김복순은 1940년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금성감리교회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린다. 박수근은 조선미술전에 입선되고 부부는 아들,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산다.
해방됐으나 남북이 갈린다. 부부는 각기 조선민주당 김화군 의원과 금성면 의원이 되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수근은 반김일성주의자로 몰려 쫓기고 김복순은 도망간 남편을 찾아내라는 공산당에 고문을 당한다.
화가 박수근에게 지혜로운 아내 김복순이 없었더라면…
2편
한국 최고의 화가 박수근(1914~1965)·김복순(1922~1979) 부부가 6·25전쟁 중 북한을 탈출한 얘기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극적이다. 이 탈출기의 주인공은 김복순이다.
소설가 박완서에 의해 ‘키 크고 잘생기고 선한 키다리 아저씨’ 묘사되는 박수근은 지혜로운 아내이자 세 남매의 강한 어머니 김복순이 아니었더라면 인민군의 총부리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화가 박수근 부부, 북한에서 부부 의원 당선으로 목숨 건져’ 편 참조) 부부의 탈출 현장이자 그들의 신혼집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은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6·25전쟁 당시 김화군 군청 소재지)에서 금강산 방향으로 25km 떨어진 소읍이었다. 김복순의 고향이었고, 박수근이 20세 전후 나이에 살던 본가 동네이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UN 연합군의 북진이 계속되면서 금성(1914년 행정구역 폐합 전까지 강원도 금성군 읍치)은 일시적으로 연합군과 국방군에 해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남하하면서 금성은 다시 인민군에 접수됐다.
‘우리는 금성에서 더 북쪽으로 피난 가면 남쪽으로 도망갈 기회가 영영 없게 되니까 죽으나 사나 중공군이 있는 금성으로 가서 방공호에 숨어 있다 월남할 기회를 엿보자고 의논하여 금성 뒷산인 성산 밑에 군인들이 파 놓은 방공호로 피신했어요. 그곳에 오니까 민간인이라곤 세포위원장과 도 반장뿐이었습니다.’(김복순 증언)
당시 연합군은 지상전이 밀리면서 전투기 공습을 강화했다. 그러면서 금성은 연일 계속되는 폭격에 읍내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 다들 공습을 피해 피난을 갔다. 박수근 김복순 일가도 원산 방향 오십 리 북쪽(김화 창도리로 추정)으로 피난을 했다. 한데 금성의 행정기관이 함께 이전한 곳으로 따라간 터라 연합군의 폭격이 계속됐다.
따라서 김복순은 죽으나 사나 집이 있는 금성 읍내로 돌아가 남한으로의 탈출을 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앞서 김복순은 창도리 피난 전 남편을 먼저 탈출시켰다. 연합군이 금성 읍내에 진주했을 때 부부는 ‘국군 환영’이란 포스터를 그리고 현수막을 거리에 붙이고 다녔다. 금성에 남한 행정기관이 복구되면서 김복순은 ‘애국부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둘째 동생은 축산전문학교에 다녔는데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재건에 힘썼다.
그런데 북진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인민군 패잔병이 늘어나면서 금성 읍내는 빨치산들에게 접수되고 말았다.
허구한 날 인민재판이 금성국민학교 교정에서 벌어졌다. 국군이 들어왔을 때 빨갱이 체포위원장을 붙잡아 총살한 우익 지도자가 역으로 마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보복 총살당했다.
그러니 박수근 부부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박수근은 낮이면 산속에 숨어 지냈다.
“금성읍 앞을 흐르는 남대천에 안개가 자욱한 날 밤이었어요.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리자 소를 끌고, 보따리를 이고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지요. 깊은 밤에 집으로 온 남편에게 남으로 피난 가자고 했어요. 애가 셋이니 네 살짜리 막내(박성인)만 업고 두 아이는 걸렸어요. 그런데 애들 때문에 걸음이 늦어져요. 이대로 가다간 나는 몰라도 남편은 잡혀 처형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를 두고 혼자 뛰세요’라고 설득했더니 그이가 수긍하고 논둑 길로 총총히 사라졌어요.”
김복순은 남편과 그 이별이 고향에서, 그토록 따스했던 집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살아서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편이 떠난 뒤 김복순은 바로 인민군에 잡히고 말았다.
“아주마이 왜 도망을 가십니까. 우리는 인민군이에요. 국방군 놈들은 다 도망가고 없어요. 이제 우리가 여기 있으면 참 좋은 세상이 될 텐데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김복순은 인민군 병사에 잡혀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부부가 국군에 협력한 모든 증거물, 그리고 집 재산이 정치보위부 트럭에 실려 나갔다. 김복순은 끌려가 회유, 협박, 고문을 당했다.
다행히 한 노인이 금성 탈출을 하다 실패한 시동생이 자신의 집에 숨어들었다는 소식과 함께 남편 박수근이 무사히 서울에 도착, 자신의 동생이 사는 서울 창신동에 있다는 소식을 김복순에게 전했다.
그 피난 과정에서 김복순은 셋째 아들 성인을 잃었다.
그런데 읍내 방공호에는 금성 읍내에 사는 세포위원장과 도 반장만이 민간인으로 같이 기거하게 됐다. 그들은 아이가 있는 엄마인데다가 동네 사람이기도 한 김복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다만 도 반장이 김복순에게 추근댔다.
“남편이 떠난 뒤 아이들과 어떻게 살겠어요. 어떻게든 저도 남편 따라 탈출해야지요. 저는 한 가지 꾀를 생각했어요. 살아남은 시동생에게 도 반장을 구슬리자고 했죠. 그의 입 한마디가 삶과 죽음을 갈랐어요. 생살여탈권을 가진 도 반장은 자녀를 두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이었어요.”
박수근의 동생, 즉 김복순의 시동생이 도 반장을 이렇게 회유했다.
“우리 형수님이 전쟁 통에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보시다시피 막내아들도 잃고 나머지 애 둘과 살길이 막막하십니다. 우리 형수님이 도 반장님 첩으로 들어가 자식이라도 낳아주면 어떻겠습니까.”
도 반장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도리어 시동생이 “우리 형수가 말을 잘 안 들으시는데 제가 서서히 설득하면 그리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그 도 반장은 폭격에 죽은 소 고기를 날마다 김복순에게 가져다주며 친절히 대했다.
“저는 어떻게든 아이들과 살아남아 남편에게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피해를 보지 않는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월남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어요. 우리가 방공호에 피난해 있는 동안 동네 사람들은 피난 과정에서 열병(장티푸스)을 앓아 길 위에서 부지기수로 죽었어요. 살아야죠, 어떻게든 살아남아 남편을 만나야죠. 남편 찾아가다 죽으면 죽고, 다행히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살리라 믿었어요.”(김복순 증언) <다음회에 이어짐:매주 일요일 오전 6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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