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에게 능력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언뜻 주어진 능력을 적절한 선에서 잘 사용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의도로 어느 곳에 사용하는지에 따라 히어로와 빌런이 엇갈린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건 꿈같은 일이다. 엄청난 힘, 혹은 특수한 능력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DC 코믹스 11번째 영화 ‘블랙 아담’(감독 자움 콜렛 세라) 주인공 블랙 아담은 반대다. 능력을 선택할 수 있다. 샤잠이라고 외치면 능력이 생기고, 다시 외치면 사라진다. 처음부터 능력을 갖길 원한 게 아니다. 자기 의지도 아니고 신의 선택을 받지도, 외계인의 피가 흐르지도 않는다. 어쩌다보니 능력을 가졌고, 어쩌다보니 히어로의 일을 마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히어로보다 훨씬 강한 힘이 있다. 선악의 경계도 모호하고 규칙도 따르지 않는 히어로가 탄생한 이유다.
‘블랙 아담’은 고대 국가 칸다크에서 왕을 위해 수많은 노예들이 희귀 금속 이터니움을 캐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노예 중 하나인 테스 아담(드웨인 존슨)은 어느 날 신의 힘을 받은 블랙 아담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힘을 사적인 복수에 사용하는 바람에 영원의 바위 아래 갇힌다. 시간이 흘러 현재, 칸다크는 국제 군사 조직 인터갱이 통치하는 독재 국가가 됐다. 인터갱에 대항하기 위해 이터니움으로 만든 고대 유물을 찾던 아드리아나(사라 샤이)는 우연히 5000년간 잠든 테스 아담을 깨운다.
테스 아담이 히어로 블랙 아담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현재 시점에 깨어난 테스 아담은 얌전히 문을 여는 대신 거칠게 벽을 부수고 앞으로 전진하는 인물이다. 세상이 구분하는 선악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논리가 그에겐 더 앞서 있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에 속한 네 명의 히어로들과 아드리아나는 야생 동물을 길들이듯 아담을 조금씩 현실에 적응시키려 한다. 아담이 가진 고민의 근원이 능력 선택에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주어진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고민하는 다른 히어로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마블 히어로들이 페이즈를 거듭할수록 힘을 써야 하는 방향에 대해 고민한다면, DC 히어로는 힘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 히어로들보다 한 차원 더 강한 힘을 보유한 설정 역시 눈에 띈다. 블랙 아담을 연기한 배우 드웨인 존슨의 육중한 신체를 보면 떠오르는 힘 그 자체를 영화로 잘 녹여냈다. ‘블랙 아담’ 속 대부분 장면은 액션으로 구성됐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물론, 눈에 보이는 건 대부분 부수고 번개로 지진다. 펀치 한 번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일본 만화 ‘원펀맨’처럼, 아담과 몸이 부딪히면 상대는 날아가고 대부분 죽는다. 인간보다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히어로와 빌런이 보여주는 액션은 그 어느 때보다 스케일이 크고 투박하다. 지금 같은 OTT 시대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아는 듯하다.
허술한 면도 존재한다. 블랙 아담 외에도 새로운 인물들이 잔뜩 등장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미룬다. 현재 칸다크의 정세와 이터니움에 관한 비밀도 함구한다. 최근 유행처럼 여러 히어로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거대한 세계관으로 가는 하나의 퍼즐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을 액션 장면으로 채우느라 정작 중요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회피하는 방식은 달갑지 않다. 곳곳에 등장하는 설정과 이야기 전개가 마블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을 주는 점 역시 아쉽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DC 코믹스의 미래가 이미 지나간 마블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블랙 아담 역을 맡은 드웨인 존슨은 ‘블랙 아담’ 구상부터 개봉까지 10년 이상 기다린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개봉한 DC 코믹스 영화 ‘샤잠!’과 이어지는 세계관이다. ‘언노운’부터 ‘커뮤터’까지 배우 리암 니슨과 네 편이나 작업한 자움 콜렛 세라 감독은 최근작 ‘정글 크루즈’에 이어 두 번째로 드웨인 존슨과 호흡을 맞췄다. 엔딩 크레딧 중간에 등장하는 쿠키 영상은 아무리 실망해도 DC 코믹스의 다음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한다. 19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