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꼭 강조하고 싶었던 건, 사회에서 위치가 확고하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였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2018년 영화 ‘블랙팬서’를 내놓으며 했던 말은 4년 후에도 유효하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감독 라이언 쿠글러)는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와칸다 수석 과학자 슈리(러티샤 라이트), 국왕 라몬다(안젤라 바셋), 장군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스파이 나키아(루피타 뇽오)는 상실과 이별에 슬퍼하고 자책하며 때로 분노하지만, 결국엔 제 임무를 수행하며 성장한다. 와칸다 왕국을 지탱하는 네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기사에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슈리
상실은 어떻게 영웅을 탄생시키는가. 슈리는 그 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오빠를 잃고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 적의 계략에 숨을 거두자 슈리는 정념에 사로잡힌다. 분노, 증오, 복수심에 매몰된 그는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닌 파괴를 위한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슈리는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책임을 깨닫는다. 그는 용서와 동맹을 오빠의 유산으로써 당연하게 물려받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고결함을 획득한다. 그렇게 슈리는 새로운 영웅으로 성장한다. 러티샤 라이트는 지난달 한국 언론과 화상으로 만난 자리에서 “슈리는 오빠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는 앞으로 나아간다”며 “그런 면이 용감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라몬다
와칸다를 이끄는 라몬다는 품위와 기백으로 무장했다. 그는 세계평화 운운하며 비브라늄을 요구하는 유럽과 미국에게 “우린 왕을 잃었으나 자신을 지킬 힘조차 잃지는 않았다”고 꼿꼿하게 경고한다. 감정에 흔들릴 듯 보이다가도 끝내는 숭고한 선택을 한다. 그는 분노하지만 폭발하지 않고 슬퍼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블랙팬서’에서 그의 정체성이 어머니로 한정됐다면,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속 라몬다는 왕이 지녀야 할 마땅할 품격을 보여준다. 안젤라 바셋은 라몬다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방언 코치를 뒀다고 한다. 그는 동료 배우를 잃은 자신의 슬픔에 아들을 여읜 라몬다의 감정을 겹쳤다. 바셋은 버라이어티를 통해 “슬픔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면서 “당신이 보는 눈물은 사랑의 표상”이라고 강조했다.
오코예
오코예는 강하다.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가 망설임 없이 적을 향해 돌진할 때마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가장 눈부신 스펙터클이 탄생한다. 하지만 오코예는 함부로 싸우지 않는다. 그는 ‘블랙 팬서’에서 전 세계에 비브라늄을 보내 흑인들을 무장시키자는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에게 “와칸다는 필요할 때만 싸운다”고 맞섰다. 그렇기에 “내 안에 많은 싸움이 남아있다”며 전력을 다해 전장을 휘젓는 오코예의 모습은 쾌감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는 다른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실수를 후회하지만, 자기가 가진 힘을 믿고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며 관객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 다나이 구리라는 뉴욕타임스에 “이 영웅적인 인물들이 유색인종 소녀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자기 소유권을 고취한다면 그걸로 됐다”고 말했다.
나키아
사랑하는 연인의 장례식. 나키아는 그곳에 없다. 라몬다는 나키아를 원망하지만, 그에겐 그만의 사정이 있다. 뇽오는 “캐릭터마다 트찰라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나키아에겐 나키아만의 방식이 있다”(CGV 인터뷰)고 설명했다. 나키아가 택한 길은 일국을 위한 세작을 넘어 더 넓은 세계와의 조우를 암시한다. 뇽오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와칸다는 여성이 성별 때문에 과소평가되지 않는 곳”이라며 “내가 와칸다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키아는 와칸다를 떠났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와칸다의 정신을 후대에 혹은 다른 세계에 퍼뜨릴 가능성을 지녔다. 이어질 ‘블랙 팬서’ 시리즈에서 나키아의 지위가 가족 구성원으로만 국한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