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대기업의 무덤’으로 불렸던 제약바이오 업계에 기업들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오리온, 롯데, CJ 등 중견·대기업 자본이 제약바이오 사업에 진출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특수를 누린 위탁생산(CMO) 및 위탁개발생산(CDMO)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다.
최근 오리온홀딩스는 이사회에서 ‘오리온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하고, 다음달 16일자로 자회사로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오리온의 대표적인 사업 분야는 식품 및 일상적인 소비재였지만, 앞으로는 제약바이오 사업에 전폭적인 투자를 추진할 예정이다. 오리온홀딩스는 오리온그룹의 지주사다.
오리온홀딩스는 2020년 중국의 국영 제약사인 산둥루캉의약과 합자법인 ‘산둥루캉하오리요우’를 설립하기도 했다. 오리온홀딩스가 65%, 산둥루캉의약이 35%를 투자했다. 주요 분야는 진단키트 및 백신 개발·생산이다. 현재 중국 현지에 1만5000평 규모의 부지를 확보해 오는 2024년 완공을 목표로 900억원을 투입, 백신 제조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올해 2월에는 국내 백신 개발 기업인 큐라티스와 핵백신 공동개발 계약도 체결했다.
롯데그룹도 제약바이오 사업 확장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 6월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출범하고 곧바로 업계 대표 행사인 바이오인터내셔널 컨벤션(바이오USA)에 참가해 존재감을 확보했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롯데지주가 104억원을 출자해 지분 80%를 확보하고 있다. 롯데 그룹이 제약바이오 사업을 벌이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주력 분야로 상정한 사업은 CDMO다. 앞서 5월13일 롯데지주는 이사회에서 글로벌 기업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의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바이오의약품 생산공장 인수를 결의했다. 롯데지주는 공시를 통해 생산공장 취득 금액은 약 1억6000만달러(한화 2060억원) 규모이며, ‘바이오 분야 진출, 투자’를 취득 목적으로 제시했다.
미국 현지뿐 아니라 국내 생산거점도 마련할 전망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출범 당시 오는 2030년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CDMO 역량으로 상위 10위에 오른다는 목표를 밝혔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현재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인천 송도, 충북 오송 등 제약바이오 산업 집약 지역을 중심으로 공장 부지 확보를 검토하고 있다.
제약바이오 업계를 탈출했다가 귀환하는 사례도 나왔다. 당초 CJ그룹은 의약품과 뷰티·헬스케어 관련 건강기능식품 등을 주력 제품으로 보유했던 CJ헬스케어(현재 HK이노엔)를 통해 제약바이오 사업을 영위했다. 하지만 강점으로 꼽히는 식품·엔터테인먼트·물류 사업에 집중한다는 사업 구조 개편 방침 하에 2018년 CJ헬스케어를 한국콜마에 매각했다.
올해 CJ그룹은 마이크로바이옴 사업으로 업계에 돌아왔다. 지난해 7월 CJ제일제당은 마이크로바이옴 연구개발 전문 기업 천랩을 983억원에 인수했다. 이어 올해 1월 CJ바이오사이언스를 출범하고 면역항암제와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파이프라인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마이크로바이옴은 인체에 존재하는 미생물 및 미생물 유전정보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제약바이오 사업은 대기업이 성공한 사례가 드물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매출 순위 상위권은 해마다 유한양행, 녹십자, 대웅제약, 종근당, 한미약품 등 창립부터 제약바이오 사업만 집중해 업계 ‘정통’으로 꼽히는 기업들이 차지했다.
하지만 삼성과 SK 등 국내 대표 대기업이 제약바이오 사업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하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삼성은 2011년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하고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바이오의약품 CMO 및 CDMO를 수주했다. 현재 완공을 앞둔 인천 송도 제4 공장의 생산역량은 총 24L로, 단일 공장 기준 세계 최대 규모다.
SK는 기존 SK케미칼에서 백신사업부를 떼어내 SK바이오사이언스를 출범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 등의 코로나19 백신 CMO를 대거 수주하며 실적을 올렸다. 오는 2024년까지 백신 생산거점인 경북 안동 소재 L하우스에 2000억원을 투자해 설비를 증설하고 신기술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목표를 추진 중이다. 현재 L하우스는 1년에 백신 약 5억 도즈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대기업의 제약바이오 사업 진출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이 전문가 전망이다. 폐쇄적이고 내수에 한정된 과거 업계와 현재 상황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해외 투자는 물론, 국내 기업과 글로벌 기업 사이의 협력이 활발해 해외 시장에서 확보할 수 있는 매출에 대한 기대가 크다. 아울러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바이오시밀러 신사업이 미래 먹거리로 급부상하고 있다.
정윤택 제약산업연구원장은 “전통적으로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는 유통 투명성이나 리베이트 문제가 고질적이었고, 시장 규모와 영역 역시 내수 중심으로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대기업이 선뜻 진출해 성공을 거두기에는 문턱이 있었다”며 “수익성은 좋은데, 다루기 까다로운 계륵과 같은 분야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성공을 계기로 대기업들이 CMO와 CDMO 사업에 높은 관심도를 보이기 시작했다”며 “CMO와 CDMO는 신약 개발보다 리스크가 적고, 자본력과 대규모 생산설비 투자가 필요한 사업인데, 이는 모두 대기업에 유리한 특징이다”라고 부연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