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사주의 외동딸로 태어난 모현민(박지현)은 야망과 지략을 타고 났다. 신문사를 물려받고도 남았을 야심가지만, 때는 성차별이 극심하던 1990년대. 모현민은 제 뜻을 펼치기도 전에 재벌가에 팔려가듯 시집간다. 그가 오를 수 있는 최고 권좌는 순양그룹 안주인 자리뿐.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조용히 수 싸움을 벌인다.
모현민은 25일 종영한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인기가 워낙 높아 온라인에선 ‘재벌집 형수님’이란 별칭이 생겼을 정도다. 모현민을 연기한 배우 박지현도 화제를 모았다. 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티빙 ‘유미의 세포들’에 출연해 조금씩 얼굴을 알리던 그는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매력을 보여줬다. 지난 21일 서울 논현동 나무엑터스 회의실에서 만난 박지현은 “모현민은 대리만족을 주는 캐릭터라 더 사랑받은 것 같다”고 돌아봤다.
“모현민은 야망에 충실하고 솔직해요. 패를 숨기는 성격이라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최대한 덜되, 억양에 강약을 넣었죠. 현실에서 그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을 많지 않잖아요. 시청자가 마음속에서만 품었던 욕망을 현민이 여과 없이 보여줘서 대리만족한 것 같아요. 저도 모현민을 연기하며 굉장히 통쾌했어요.”
박지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현민을 입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나온 명품 브랜드 패션쇼를 훑어 모현민의 패션을 완성했다. 그는 손끝까지 공을 들였다. “화장과 의상에 맞춰 장면마다 다른 네일아트를 했다”고 했다. 모현민이 진동기(조한철)와 작당 모의하는 장면에서 입은 체크무늬 투피스와 모자는 박지현이 해외 쇼핑몰에서 ‘직구’한 의상이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데뷔 전 연기 스승이었던 조한철과 독대하는 귀한 장면이라서다. 박지현은 “평소처럼 ‘한철 쌤’이라고 부르니, ‘무슨 선생님이냐. 이젠 동료다’라고 해주셨다”며 감회에 젖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모현민은 남편 진성준(김남희)의 ‘찐 광기’ 앞에서 점차 색을 잃는다. 진양철(이성민)이 죽을 위기를 넘기고 집안이 흉흉하던 때, 판세를 읽으려는 모현민을 진성준은 이렇게 모욕한다. “머리 나쁘게 굴면 어떡해. 그런 여자들은 밖에도 많은데.” 박지현은 “현민은 기댈 곳 없어도 꼿꼿하게 자기 야망을 이루려는 사람”이라면서 “머리 빗는 장면을 통해 현민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촬영 당시엔 시간이 모자라 없어질 뻔한 장면이지만, 김남희가 적극 편을 들어준 덕에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박지현은 “시청자로서 이렇게 몰입해서 드라마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로 ‘재벌집 막내아들’에 애정이 깊었다. 2017년 MBC ‘왕은 사랑한다’로 데뷔한 그는 “연기를 하면 어린 시절 언니·남동생과 역할극 하던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연기만으로도 즐거운데 “촬영장도 지어주고 심지어 돈까지 주니” 배우가 천직이라고도 했다. 한때 수많은 오디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 “내가 부족한가 혹은 예쁘지 않나 등 내 안에서 문제를 찾았다”던 그는 “언젠가부터 내가 캐릭터와 맞지 않는 것일 뿐, 탈락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을 회복했다. 늦은 사춘기를 끝낸 박지현은 “매일 행복하기”를 꿈꾼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 그게 제 목표이자 새해 다짐이에요. 곧 30대가 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면 젊은 거고, 어른스럽다고 여기면 어른스러운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30대가 된다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싶진 않아요.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만나 평생 연기하고 싶을 뿐이에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