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감독 정주리)는 다음 소희가 누구인지 지정하지 않는다. 누구든 극 중 소희(김시은)와 같은 일을 겪을 수 있다고 암시할 뿐이다. 배우 배두나가 연기한 오유진 역시 같은 생각을 한다. 유진은 소희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소희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한다. 잠시 ‘다음’ 소희가 되어 진짜 사회에서 계속 나타날 다음 소희들을 떠올린다.
어둡고 일주일 동안 못 잔 사람. 정주리 감독이 배두나에게 설명한 오유진의 이미지다. 지난 2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나 배우 배두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추상적이죠”라고 말하며 웃었다. 정 감독과는 2014년 개봉한 영화 ‘도희야’에서 이미 함께했다. 그래서 더 신뢰했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타협이나 융통성이 없는 점이 특히 그렇다.
“‘도희야’도 그랬지만, 또 정주리 감독님의 글이 좋더라고요. 제가 그분의 글솜씨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다음 소희’ 대본 첫 장을 읽을 때부터 여전하구나 하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미 감독님을 알아서 더 감동한 면도 있어요. 이분이 또 이런 좋은 글을 썼고, 영화화 하고 싶어 하는구나 싶더라고요. 뭔가 좀 더 대중들이 원하는 영화로 타협할 수 있었지만, 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구나 싶었어요.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또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는 소재와 주제이기도 했어요. 감독님에게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는 얘기도 했어요. 아이들이나 청소년, 사회 초년생들에게 너무 가혹한 얘기, 모르고 지나갈 법한 얘기를 들었을 때 지나치게 분노하는 경향이 있어요.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졌어요. 대본을 다 읽자마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본에도 여백이 많았다. 배두나는 그 여백을 보고 “굳이 채울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소희’는 소희에 대한 이야기다. 배두나는 자신이 연기한 유진을 “관객들이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여백은 그대로 놔두고, 배경 설명은 소설처럼 채웠다. 유진이 분노하고 때리는 장면엔 진심으로 몰입했다.
“전 계산해서 연기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그 장면에서 진짜 분노가 확 올라오더라고요. 소리를 지르는 장면도 아닌데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가 쫙쫙 갈라지더라고요. 보통 참으려고 하지만, ‘다음 소희’에선 어느 정도 날것으로 소리를 냈어요. 때리는 장면에서 전 유진이 또 다른 소희, 다음 소희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희를 알아가면서 그가 느낀 막막함을 그대로 느끼잖아요. 그러다가 도저히 못 참는 상황이 오는 거죠. 가맥집에서 소희와 똑같이 앉아있는 장면도 그래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전에도 일어나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잖아요. 쳇바퀴 돌듯이 왜 계속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려는 의도 아닐까요.”
배두나는 최근 10년 동안 출연작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전엔 잘할 수 있고 그동안 잘해온 역할을 맡으려 했다. 하지만 최근엔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작품에도 출연한다. ‘다음 소희’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였다.
“전 연구하고 분석해서 캐릭터가 어떻게 행동하고 느낄지 먼저 그어놓지 않아요. 그 자리에서 진짜 날 것을 느끼면서 연기하거든요. 아직도 제 방식이 맞다고 생각해요. ‘다음 소희’는 소희의 얘기를 유진이 다시 되짚으면서 알아내는 이야기잖아요. 거기에서 감정이 비치죠. 관객들은 이미 소희가 어떤 여정을 했는지 알아요. 제가 그 여정을 다시 갈 때 계산한 연기를 하면 괴리감이 커질 것 같았어요. 유진과 같이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서 왠지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