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과 개화기 조선에 들어온 서양 의사는 인술을 펼치는 본연의 일 외에도 계몽가, 사회사업가, 교육자, 건축가, 선교사, 보건위생 및 방역전문가 등으로서 다양한 일을 했다. 나아가 약소민족을 돕는 활동가이기도 했다.
조선에 온 서양 의사 가운데 올리버 에비슨(1860~1956)은 ‘대한민국 정부 독립장’(1953년)을 받았고 이외에도 수많은 외국인 의사들이 우리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따라서 근대의학 형성과정에서 서양 의사의 역할은 의사라기보다 사회 전반을 이끌었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선생’으로 불리는 것이 적절했다.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담을 끼고 일제강점기 건축된 고풍스러운 근대건축물이 눈길을 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서대문선교회관으로 사용되는 조적조 기와지붕 2층 건물이다.
1933년 경성시가도를 보면 이 건물 외에 2동의 건물이 더 있었다. 이 건물을 지은 이는 의사 토머스 맨스필드(생몰년 미상․재한 1920~1926)이다. 한국명 만수필(万秀弼), ‘1만가지 일을 뛰어나게 돕는다’는 이름답게 실제 그렇게 살았다.
그는 세브란스병원 부원장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부원장을 역임했다.
1919년 3월 10일 함경북도 성진. 애국청년 배민수(독립운동가․1987~1968)가 함북 공업 도시이자 개화 도시인 성진(현 김책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는 불과 두 달 전 항일 무장투쟁 조직 ‘대한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수개월 간의 옥살이를 한 뒤 석방됐었다. 모진 고문을 이겨낸 투사였다. 그는 김형직(김일성의 아버지)과 평양숭의전문학교 동기로 같이 ‘대한국민회’ 사건으로 같이 수감됐었다.
성진 3․1만세운동은 강학린(1885~1937․독립운동가) 목사가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함성을 높였다. 그때 배민수는 시위대를 이끌고 성진경찰서 일경과 제일선에서 맞섰다. 그 대치 장소가 성진 제동병원 앞이었다.
“…경찰과 헌병대가 총검을 들고 우리를 밀어붙였다. …그들은 병원 위쪽으로 우리를 몰았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도망가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리는 온통 피바다였다. 나는 닭장 속에 몸을 숨겼다.”
그는 체포를 모면했으나 어머니 장희운(1886~1945)이 현장에서 체포되자 이튿날 연행에 응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같이 성진 유치장에 수감됐다. 배민수가 체포되자 장희운은 풀려났다.
며칠 후 배민수는 성진경찰서장실로 호출됐다. 거기에 갈색 장화와 군모를 쓴 미군 군의관이 서장과 멋쩍게 마주하고 있었다. 맨스필드였다. 그는 성진 북쪽 러시아 접경 도시 블라디보스톡에서 급하게 내려 왔다.
성진 제동병원 의사들과 캐나다장로회 성진스테이션 선교사들이 SOS를 쳤기 때문이었다. 선교부는 맨스필드에게 환자 치료보다는 수감된 조선인 석방 협상을 요청했다.
“…누구나 자유를 원하며 노예처럼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구속으로부터 풀려나길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맨스필드의 얘기에도 서장은 서양 의사 및 선교사들이 만세운동을 배후 조종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 했다. 한편 감옥 안에서는 모든 죄수가 매를 맞으며 이 같은 심문을 받았다.
“누가 너희를 선동했지? 그 서양 의사들과 선교사들 아닌가.”
그때 맨스필드와 일경 서장과의 대화는 배민수가 영어 통역을 했다. 사실 맨스필드는 한국말을 잘했으나 모르는 척 했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배민수 등을 비롯한 수감자들에게 잘 대우해 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그들도 그들의 조국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1920년 7월 10일.
배민수는 맨스필드와 서양 의료선교사들의 구명운동과 재판 지원으로 1년 4개월을 복역하고 함흥교도소를 출감했다. 그가 성진 유치장에 수감됐을 때 시위 중 목에 큰 상처를 입은 20대 청년이 일본인 수련의로부터 수술을 받았는데 그 수련의가 환자의 동맥을 끊어 죽게 한 의료 사고에 강력 항의하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성진 시위자 30여 명은 서울로 이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해부학 교수로 활동하던 맨스필드 등이 백방으로 뛰어 그들의 재판을 도왔다.
그 당시 배민수는 일제에게 중범죄자였다. 항일무장투쟁 혐의로 출옥한지 2개월 만에 시위 혐의로 체포됐기 때문이다. 캐나다장로회 소속 의사 맨스필드 등의 구명 활동이 아니었으면 처형될 위기였다.
'만수필 박사의 퇴근길' 걸어보셨나요?
‘서대문선교회관’은 맨스필드가 건축주가 되어 세브란스병원(현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 일대) 직원 숙소 및 학생 기숙사 등으로 사용됐다. 1920년대는 맨스필드가 배민수와 같은 조선 기독청년들을 도우며 세브란스병원 사택으로 쓰기도 했다.
일제 말 맨스필드를 비롯한 서양 의사들이 강제 추방됐다. 해방 후 미 군정청 군무원 숙소와 재입국한 캐나다선교부 선교사 등으로 사용됐다. 6․25전쟁과 전쟁 직후 진료소 성격의 전시 임시 병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맨스필드는 세브란스병원 근무 때 서대문 자택을 나와 서울역 앞 병원까지 걸어 다녔는데 이에 착안해 서대문구청 등이 그 일대 근대문화재를 대상으로 한 ‘만수필 박사의 퇴근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