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도연은 영화 ‘길복순’(감독 변성현) 출연을 제안받고도 편히 기뻐하지 못했다. 예산이 100억원대라는 얘기 때문이었다. ‘전도연 주연으론 투자가 안 된다’는 걱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그 말이 자신도 상처 입힐 것 같아서였다. ‘칸의 여왕’ 전도연이 투자 걱정이라니. 여성 배우에게 척박한 한국 영화 현실이 절실히 느껴졌다. 지난 5일 서울 소공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전도연은 말했다. “그래서 ‘길복순’ 제작이 결정됐을 때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어요. 작품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스스로에게도 ‘거봐.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라고 말해줬죠.”
‘길복순’은 변성현 감독이 처음부터 전도연을 모델로 쓴 영화다. 엄마 전도연과 배우 전도연 사이 괴리를 ‘워킹맘’ 길복순(전도연)으로 풀어냈다. 길복순은 킬러다. 낮에는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사람을 키운다. 요즘 그의 속을 긁는 사람은 칼깨나 휘두른다는 일본 야쿠자도, 호시탐탐 자기 자릴 노리는 후배 킬러도 아니다. 복순은 자신에게 벽을 쌓는 열다섯 살 난 딸 재영(김시아)이 제일 고민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
재영과 동갑내기인 딸을 키우는 전도연은 이 대사에 공감이 갔다고 했다. “저 역시 여전히 실수하고 부딪히고 반성하며 살아가는 미완성 인간이에요. 서툴지만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있어요.” 어린 시절 “제일 잘하는 게 집안일이라 현모양처가 꿈”이었다는 전도연은 요즘 딸 또래 여성들에게 꿈을 제시하는 길잡이로 거듭났다. 요즘 그에겐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10·20대 여성 팬들의 편지가 쇄도한다. 지난달 종영한 tvN ‘일타 스캔들’이 최고 시청률 17.0%(닐슨코리아, 전국유료방송가구)를 기록하는 등 인기를 누리며 젊은 세대와 접점을 늘린 덕분이다.
30년 넘는 연기 인생 중 전성기가 아닌 시절을 꼽기 어려운 배우. 젊은 시절 영화 ‘접속’(감독 장윤현), ‘약속’(감독 김유진), ‘내 마음의 풍금’(감독 이영재) 등을 연달아 흥행시켜 ‘흥행 공주’로 불렸고,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으로는 한국 배우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살아있는 전설. 전도연은 “나는 지금도 꿈을 이루는 중”이라고 했다. 그의 꿈은 더 큰 영화, 더 많은 상, 더 높은 흥행 기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는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다”고 말했다. “늘 자신감에 차 있는 편은 아니에요. 다만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래서 더 완벽해지려고 해요.”
‘길복순’을 찍을 때도 그랬다. 데뷔 후 처음으로 원톱 액션을 소화한 그는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주변 반응에도 “한 번 더”를 외치며 촬영을 거듭했다. 근육을 만들려고 넉 달간 절주하며 운동에 매달리기도 했다. 정성이 통한 걸까. 복순이 풋내기 킬러 영지(이연)와 즉석에서 대련하는 장면을 찍을 땐 변 감독이 ‘여성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또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단다. 전도연은 “남성 감독님들은 남성 배우들과의 소통을 더 편하게 느끼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들과 또 작업해보고 싶단 말이 다른 어떤 칭찬보다 좋았다”며 “배우들도 카메라 앞에선 선후배가 아니라 동료이자 라이벌이다. 내 딸을 연기한 시아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연기 인생의 시작은 “운이 좋아서”였지만, 지금은 “연기는 내 천직”이라고 전도연은 믿는다. 배우로 갈 길을 제시해 준 작품은 1999년 개봉한 영화 ‘해피 엔드’(감독 정지우). 전도연은 내연남을 둔 커리어우먼 최보라를 맡아 그간 금기시되던 여성의 성적 욕망을 표현했다. 노출 장면 때문에 광고 계약이 모두 끊기는 수모를 겪었지만, 전도연은 “그 일이 상처이긴 했으나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다”(tvN ‘유 퀴즈 온 더 블록’)로 했다. 그래서 전도연의 여정은 여성을 한계 짓는 편견에 맞서는 과정과도 겹친다. 그의 앞날이 끊임없이 기대되는 이유다.
“슬럼프까진 아녀도 힘든 시기는 있었죠.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감독 김용훈)을 끝낸 이후가 그랬어요. 영화는 많은데 왜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은 없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그런 시간을 견딘 건 결국 저 자신 때문이에요. 저는 저를 믿거든요. 나는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라고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