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 ‘CES 2023’에선 둥글고 평평한 형태의, 흡사 미확인 비행물체(UFO)처럼 생긴 게임 컨트롤러가 등장해 눈길을 모았다. 소니가 접근성 분야의 전문가, 커뮤니티 회원 등과 개발한 장애인을 위한 게임 컨트롤러 ‘프로젝트 레오나르도’다.
이 컨트롤러는 성향에 따라 각 버튼을 원하는 위치로 이동하거나 조합하는 등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스틱과 게임 패드의 거리도 조절 가능하고, 넓고 평평한 형태라 발을 이용해서도 게임을 할 수 있다. 몸이 불편해 원하는 대로 조작이 힘든 장애인 게이머들에겐 모처럼 들려온 반가운 소식이다.
장애인 게임 접근성 개선을 위한 글로벌 게임사들의 노력은 해를 거듭하며 활발해지고 있다. 게임 접근성은 게임에 접근하거나 즐기는 데 불필요한 장벽을 허무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적 제약이 있는 이용자가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도우는 보조기기 뿐만 아니라, 자유도 높은 게임 옵션을 지원해 보다 다양한 유형의 이용자들을 포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 소니 등 글로벌 게임사들은 10여년 전부터 게임 접근성과 관련한 자체 가이드라인을 제작, 개발 단계부터 적용하고 있다. MS는 장애인 게임 접근성 문제에 특히 높은 관심을 보이는 회사다. 2018년 장애인들을 위한 적응형 컨트롤러를 출시했으며, 게임업계 전문가 및 장애인 커뮤니티 구성원과 협력해 ‘엑스박스 접근성 지침’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게임 개발자들에게 게임 접근성에 대한 이해를 돕고 개발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 받는다.
반면 국내 게임사의 장애인 접근성 인식은 현재 걸음마 단계다. 넥슨의 ‘던전앤파이터’, 스마일게이트의 ‘로스트아크’, 넷마블의 ‘블레이드 앤 소울 레볼루션’ 등을 제외하면 색약모드조차 지원하지 않는 게임이 대부분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이 발표한 ‘2022 장애인 게임 접근성 제고 방안’에 따르면 장애의 정도가 심한 게임 이용자는 전용 컨트롤러 등 하드웨어 기기 개발 지원(50.0%)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정도가 심하지 않은 이용자는 모두가 동등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UI(유저 인터페이스)‧UX(사용자 경험) 개발 및 적용 지원(45.5%)이 가장 필요하다고 답했다.
장애인 접근성 문제는 곧 다양성 문제
지난해 MS 측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4억 명 이상의 장애인 게이머가 존재한다. 2017년 외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3000만 명 이상의 장애인이 게임을 즐긴다. 전문가들은 이제 국내 게임사도 장애인을 사회 공헌의 대상으로만 보기보다, 잠재적 이용자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임업계가 점차 여성 이용자의 게임 접근성을 높인 것처럼, 장애인 이용자에게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고령화로 인한 장애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는 등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인종과 성별 등 다양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게임 접근성 문제는 향후 게임사가 해결해야 할 필수 과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경혁 게임 평론가는 “접근성은 말 그대로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면서 “그간 남성 게이머가 많았지만 서구권에선 남녀 비율이 5대 5로 맞춰졌다. 국내도 모바일 시장이 열리며 성비가 균등해졌다. 폭 넓은 의미에서 장애인 게임 접근성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매출에도 악영향이 오는 시대다. 인종이나 성 문제와 장애인 게임 접근성 문제는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게임문화를 연구하는 도영임 교수는 “10여 년 전과 비교할 때 게임 이용자의 분포가 아동, 청소년, 성인, 중 노년까지 폭넓게 확장되고 있다. 노화로 인한 신체적, 인지적 기능 감퇴를 경험한 사람도 다수 있을 것이고, 장애 등급을 받지 않았으나 개인적이나 사회적인 이유로 준 장애인 조건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며 “결국 게임사는 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개발한 게임이 어떤 다양한 사람들에게 선택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배제하면 그만큼 시장에서 고객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젠더·종교·지역·국가·언어·신체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개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계속 포용하면서 어떻게 글로벌 플레이어 커뮤니티를 만들 것인가가 문제다. 당연히 회사에서도 게임 커뮤니티와 게임 플레이어를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중 한 축이 장애인 게임 접근성 이슈”라며 “장애인 그룹도 겉보기에는 한 그룹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많은 장애인이 실제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 결국은 지속할만한 회사, 신뢰할만한 회사, 플레이어와 오래 함께 살아갈 회사를 만드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뒤늦게나마 국내도 몇몇 대형 게임사를 중심으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카카오게임즈는 최근 장애인 게임 접근성 향상을 위한 보조기기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보조기기 지원 사업은 카카오게임즈가 아름다운재단, 국립재활원,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와 협력하는 사회공헌 사업이다. 카카오게임즈는 게임 접근성 개선을 위한 가이드라인 제정 작업도 시작했다. 향후에는 다양한 특성을 가진 장애인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진행해 UX·UI 등을 개선한다.
엔씨소프트(엔씨) 역시 ‘게임 접근성 가이드라인 연구’를 시작했다. 향후 ‘오디오’, ‘컨트롤’, ‘인터페이스’, ‘커뮤니케이션’ 등 여러 방면으로 접근성 강화 방안을 연구하고 단계적으로 게임에 적용할 계획이다. 엔씨는 소통이 어려운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보완대체 의사소통(AAC)’ 사업을 2012년부터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스마일게이트는 지난해 9월 국내 게임사 최초로 ‘D&I(다양성·포용성)실’을 신설했다. D&I실은 지난 1월 ‘D&I 위원회 발족식’을 갖고 게임·플랫폼 개발, 서비스, 인사, 총무, 전략, PR 등의 부서 리더들을 1기 위원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각자 업무 영역에서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를 실현하고, 구성원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스마일게이트 그룹 전체가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장애인 접근성 개선, 장애인 개발자 채용부터
전문가들은 더 나아가 국내 게임사들도 장애인 개발자를 적극 채용해 개발 단계부터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프트웨어나 기술적인 이해만 갖추고 있다면, 장애인 개발자가 누구보다 장애인의 관점과 입장을 잘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MS사는 차세대 접근성 기술 개발을 위해 장애인들을 접근성 전문가로 적극 채용하고 있다. 반면 현재 국내 게임사 대부분은 모니터링 업무를 맡기거나 사내 카페 등의 시설에서 제한적으로 장애인을 고용하는 데 그친다.
이 평론가는 “당사자성이 가장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장애인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 만들고 싶다면 장애인이 게임사에 있어야 되는 게 제 1원칙이라고 본다. 직접 테스트하고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모든 게임을 최소한 한 번이라도 테스트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립재활원에서 장애인 보조기기를 만드는 이평호 연구원은 “비장애인이 만든 보조 기기는 장애인이 쓰기에 2% 부족하다. 물건을 사용하는 입장에서 ‘감성’이 다르다. 보조 기기는 디테일한 부분에서 판도가 갈린다. 완성도를 높여야 장애인에게 필요한 보조 기기를 만들 수 있다”고 첨언했다.
문대찬, 성기훈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