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쿠키뉴스가 만난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의 원인을 밝힐 방법도, 책임을 질 이들도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급발진 피해자들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와 가능한 해결 방안을 담아봤습니다. |
같은 제조사라도 해외 급발진 의심 사고와 국내 급발진 의심 사고를 대처하는 태도는 다르다. 전문가들은 제조사가 내수시장을 차별하는 원인이 해외시장과 같은 법적인 안전망 부재에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보호받는다. 미국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하면 제조사는 이 제도에 따라 법원의 자료 제출 명령을 즉시 따르고 있다. 피해 정도에 따라 피해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거나 합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반면 국내의 경우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피해자가 제조사에 차량 결함을 판단할 수 있는 내부 자료를 요청하더라도 영업 비밀을 내세워 거부하고 있다. 전자 부품, 자동차와 같은 AI가 결합된 기기는 정보 비대칭 문제가 극심해, 전동화, AI, 알고리즘과 관련한 결함 입증은 투명하게 정보 값이 공개되어야 가능하다. 국내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로 인해 제조사가 피해자의 자료 요청에 “소송하시라”는 답변을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전문가들은 법적인 안전망이 제조사에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어 이들이 급발진 소송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한다.
BMW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는 제조사 측에 사고 당시 녹음된 블랙박스를 제출하며 음향 감정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았다고 결론을 낸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다. 제조사들은 사고 순간 피해자가 중립 기어(N)에 놓고 풀 액셀을 밟았다고 판단하기까지 했다. 피해자는 ‘가속이 붙는 상황에서 인명사고를 피하고자 양손으로 핸들을 꽉 잡았다. 긴박한 순간에 기어를 변경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내용의 제안서를 보냈다.
돌아온 답은 “소송하시라”는 말이었다. 그는 “감정적인 호소도 해보고, 답답한 마음에 화도 내봤다. 어떤 말을 하든 소송하라는 말만 했다. 결국 민사 소송을 제기한 상태”라고 했다.
쿠키뉴스는 지난 8일 피해자와 함께 서초 매장을 방문해 BMW 사고조사팀 관계자를 만났다. 관계자는 “의도치 않은 가속은 매달 발생한다. 관련해서 감식도 이루어지고 있다”며 “블랙박스에 녹음된 소리만으로는 객관적 판단이 어렵다. 페달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었다면 신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차들은 ECU(전자제어장치)가 신호 값을 통제한다. ECU가 제어를 하면서 플랩이 100% 열렸을 때 엄청난 속도로 차가 나가는 조건이 된다”며 “만약 ECU에 문제가 있어 의도치 않은 가속이 발생했다면 국토부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0.001% 오류가 생길 가능성은 있지만 이를 입증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조사를 신뢰해 구매했는데 사고 이후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제조사에 실망했다는 피해자도 있다.
제네시스 G80 차주 김승찬(가명)씨는 급발진 의심 사고 이후 현대자동차 고객지원솔루션팀에 여러 차례 면담을 요청했다. 김 씨는 “제조사 측과 연락이 잘 안됐다. 어렵게 연락이 닿으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매뉴얼대로 같은 대응만 되풀이했다”며 “부품 결함에 대해 과학적인 증명을 해달라고 요청하면 ‘많은 돈이 들어 불가능하다. 소송하시라’ 식의 답변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제네시스를 구매한 이유는 해당 차량 제조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면서도 “세계적으로도 위상이 높은 브랜드가 사고 원인 규명에 있어서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실망스럽다. 현대차에서도 인정을 안 하니 다른 제조사들도 버티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하면 제조사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지난 2007년 미국 오하이오주 노턴에서 2006년형 기아자동차 아만티(국내명 오피러스) 차주였던 매리 맥다니엘스는 법정소송을 벌여 급발진 사고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당시 기아차 미국법인은 아만티에서 기계적 결함을 발견할 수 없었다며 운전자 과실에 무게를 실었다. 미국 자동차 사고 기술자문 전문업체인 SRS에 따르면 결국 이 소송은 지난 2012년 1월 비밀 합의로 마무리됐다. 내수시장과 차별점을 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당시 기아차 관계자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비밀 합의여서 비용 등 어떤 것도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다만 제조사가 차량에 문제가 없다고 확신해 재심을 준비했지만 소비자가 소송을 포기하고 합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쿠키뉴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대자동차 측에 당시 상황을 문의했지만 역시 “공식적으로 어떠한 입장도 밝히기 어렵다”는 입장만 전달 받았다.
법조계에서는 자동차 업계의 부담을 덜어주는 불공정한 구조를 법 개선을 통해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는 “AI의 가장 큰 특징은 불투명성”이라며 “자동차는 AI가 적용된 대표적인 제조물인 만큼 피해자가 결함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서는 급발진은 소프트웨어 결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만 불공정한 상황을 방치해 비슷한 피해 사례가 꾸준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은비 기자 silver_b@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