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조연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던 배우가 주연으로 발돋움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주연을 맡던 배우가 갑자기 조연으로 출연하는 경우는 드물다. 거절할 수 있음에도 조연을 자처한 배우 이청아의 행보가 눈에 띄는 이유다.
이청아는 지난 14일 종영된 MBC 수목드라마 ‘운빨로맨스’에서 주인공 제수호(류준열)의 첫사랑이자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의 에이전트 한설희 역을 맡았다. 2002년 데뷔해 2004년 영화 ‘늑대의 유혹’으로 얼굴을 알린 그녀는 꾸준히 주인공 역할을 맡아왔다.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악녀 포지션에 가까운 조연은 처음이다. 하지만 지난 19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이청아는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한설희 역을 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감독님이 갑자기 한설희 역할로 불러주셔서 의외였어요. 아, 이제는 내가 확실히 나이를 먹어서 이런 역할이 어울리나 보다 싶었죠. 그동안 잘 사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설희가 드라마 주인공이었다면 저에게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청아가 이런 이미지도 가능하다는 신뢰를 쌓아야 다음 단계도 가능한 거잖아요. 사실 저는 제가 항상 주인공을 했다는 생각도 잘 안했어요. 조연이나 작은 역할로 섭외가 들어와도 ‘나한테 이런 역할을 줘?’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거든요. 지금은 졸업했지만, 학교 다닐 때는 회사 몰래 단편 영화에 많이 출연했어요. 연기를 쉬면 감이 떨어질까 불안해서 더 많은 변화나 나를 테스트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해보고 싶죠.”
첫 조연으로 드라마를 마친 소감도 남다르다. 주인공 연기에 익숙해져 있던 이청아는 ‘운빨로맨스’를 통해 조연으로서 연기하는 방식도 새롭게 터득했다. 덕분에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연기해왔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조연 연기는 정말 어려워요. 주인공 연기와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주인공은 전체 120신이 있으면 100신에 출연해요. 제가 연기한 톤이 중심이 되고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도 아는 사람이죠. 반대로 조연은 타당하지 않은 연기를 해야 될 때가 있어요. 또 출연 분량이 적기 때문에 조금만 실수해도 캐릭터의 중심이 크게 흔들리죠. 처음엔 방송을 보다가 제가 찍은 분량이 날아가면, 제 멘탈도 날아갔어요. 저 장면이 없으면 시청자들이 다음 감정을 모를 텐데 싶었죠. 그런데 조연은 그런 생각보다 찍는 장면 자체에 집중하면서 어떻게 해야 임팩트 있게 전달될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여태까지 긴 호흡으로 감정을 연결하는 연기를 많이 해서 스스로 인물의 타당성을 너무 따지고 있더라고요.”
‘운빨로맨스’는 착한 드라마로 불린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누군가의 사랑을 방해하는 독한 악역도 없고, 막장드라마적인 요소도 없기 때문이다. 착한 인물들 틈에서 그나마 꼽을 수 있는 악역이 이청아가 맡은 한설희다. 한설희는 자신의 첫사랑 제수호를 되찾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적극적인 여성이다. 이청아는 그런 한설희를 연기하며 극에서 악역이 필요한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설희가 보늬가 하는 일을 훼방 놓는 장면을 찍을 때 처음으로 현장에서 ‘잠깐만요’라고 외치고 촬영을 중지시켰어요. 설희가 왜 이간질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죠. 그동안 이어온 설희의 정서와 달랐으니까요. 제가 그때까지 봤던 설희는 거짓말하기 싫을 것 같았어요. 보늬에게 ‘페어플레이 하자’고 선전포고하는 느낌으로 생각했는데 대본에는 거짓말을 하는 걸로 쓰여있었죠.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하다가 결국엔 했어요. 그런데 막상 방송을 보니까 극적인 긴장감은 확실히 생기더라고요. 저도 보늬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화가 나는 거예요. 아, 이래서 악역이 필요하구나 싶었죠. 누군가를 괴롭힐 이유가 없다고 해도 주인공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면 그런 인물과 사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청아는 ‘운빨로맨스’를 하며 연기 외에도 개인적으로 배운 것이 많다고 털어놨다. 실제 이청아와 전혀 다른 면이 있는 인물이어도 연기를 하다보면 그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이청아는 배우라는 좋은 직업 덕분에 살면서 느낀 높은 벽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설희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자신감이 넘쳐요. 남들이 나를 안 좋아해도 자신이 잘못한 게 없으면 눈치를 별로 안 보죠. 누군가에겐 착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착하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이청아는 주변을 많이 배려하고 걱정이 많은 성격이에요. 남들은 착하다고 하는데 저 스스로는 착하지 못한 순간을 후회하죠. 설희가 자기 자신을 믿고 ‘난 좋은 사람이야. 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점을 배우고 싶었어요. 나도 이렇게 살았으면 시원시원했을 텐데 왜 걱정과 스트레스를 끌어안고 살았지 싶은 거죠. ‘꽃미남 라면가게’에서는 화내는 법을 배웠어요. 원래 저는 화를 못내는 성격인데 화를 한번 내면 일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거예요. 작품을 할 때마다 게임하듯이 제 약점을 하나씩 극복하는 것 같아요. 이제 저는 설희 같은 사람을 만나도 안 미워할 것 같아요. 악의가 없다는 걸 알거든요.”
12년 전 배우 강동원과 조한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작은 소녀 이청아는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온 30대 여배우 이청아가 됐다. 돌다리도 두들기고 안 건널 정도로 소심한 성격이라는 이청아는 배우로서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계속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다는 각오다.
“30대가 되고 전보다 덜 조심스러워졌어요. 전에는 제 세상이 좁으니까 해보지도 않았는데 작은 것 하나만 들어와도 큰일이 생길 것 같았어요. 살다보니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엄청난 일들이 벌어져도 막상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더라고요. ‘아이, 몰라’ 하고 툭 저지른 게 저에게 더 많은 것들을 겪게 했죠. 배우는 익숙해지는 게 제일 안 좋은 것 같아요. 대본을 받을 때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연기해야 하는데 익숙해지면 신선함이 떨어지거든요. 저와 다른 인물이어도 저에게 제안이 들어올 수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고 싶어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