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대 최고의 걸 그룹, 호남여성농악 맥 이어가-
-제도권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한 예인 꿈꾸는 여성 단원들 -
-안정된 삶 포기하고 전통문화 살리려 혼신-
-여성 예술가들을 위한 사회적협동조합 만들어-
“1969년 10월 말, 낡은 트럭 한 대가 추수가 막바지에 다른 김제평야를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다. 중간 중간 구멍이 숭숭 난 덮개를 씌운 트럭 뒷자리에는 30여명의 여성농악단 단원들이 흔들리는 차제에 몸을 맏기고 있다. 불편한 자리에 힘도 들 만한데 타고난 예인들이라 젊은 소리꾼의 시원한 판소리에 어깨춤을 들썩이더니 이내 트럭 밖으로 깨알같은 웃음을 쏟아낸다. 이들을 맞이할 김제 읍내의 한 공터에는 이미 사각형의 무대공사가 한참이고 지나가던 주민들은 신기한 듯 주변을 한참이나 서성거린다.
공연장에 도착한 여성단원들은 대충 얼굴에 분을 바르고 태평소를 앞세워 길놀이를 하면서 전단도 뿌리고 공연을 홍보한다. 추수를 끝낸 남성들은 벌써부터 당대 최고의 여성 걸 그룹이 펼칠 신명하는 공연 한마당에 마음이 설렌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K-POP 공연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표를 구하기 위해 새끼줄 사이로 길게 줄을 서있다.
“마침내 큰 박수와 함께 앵두빛 고운 여성들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첫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은 판굿, 민요, 줄타기, 개인놀이, 단막극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흐르는 여인들의 춤사위가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상모에 달린 기러기 털을 엮어 만든 부포 꽃이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쉼없이 접었다 펼쳐진다. 이어 무대를 박차고 올라 360도 공중제비를 도는 상모놀이에 박수가 터졌다. 몸이 돌고 상모가 돌고 소리도 따라 돌았다. 여인들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 무렵 “얼쑤, 잘한다!” 화답과 함께 옷깃과 장구에는 꼬깃꼬깃 지폐가 수북이 꼿혔다.”
김운태 단장이 어렴풋한 5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성국극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50년대 후반 ‘남원여성농악단’을 시작으로 탄생한 20여 단체의 여성농악단 역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1970년대 말까지 명성을 이어갔다. 남성 단원 몇 명을 포함해 30명에서 40여명으로 구성된 여성농악단은 트럭에 말뚝과 광목포장을 싣고 전국을 떠돌며 풍물과 소리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추수를 마친 가을 공연에 손님이 가득 차는 날에는 이밥에 고깃국 배불리 먹고, 보릿고개 어려운 시절에는 식은 보리밥 한 줌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끼 많은 여인들은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에 힘든 줄 모르고 버선목 발갛게 춤추고 북치고 장구치며 핏대 세워 노래했다.
특히 김칠선 단장이 운영했던 호남여성농악단은 농악과 민요, 창극 외에도 동춘서커스단을 흡수해 대규모 흥행단을 만들어 공연을 펼쳤다. 악극단, 쇼단, 곡마단, 서커스단 등 규모와 인기에서 타 농악단을 압도한 호남여성농악단은 전국을 돌며 흥행 신기록을 이어갔다. 판소리 명창 안숙선 씨, 김영자 씨 등도 여성농악단 출신이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관혼상제와 무속 전통을 옥죄면서 여성농악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와 함께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집집마다 TV가 보급되고, 건축 붐이 일면서 대규모 살림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서자 이들의 무대인 공터가 사라졌다. 결국 79년 '호남여성농악단'을 마지막으로 여성농악단은 자취를 감추었다.
-여성농악단의 부활, 춤추는 바람꽃 “연희단팔산대”-
1995년 전통 예술 연출가 진옥섭은 당시 대학로 두레극장에서 흩어진 단원을 모아 판굿 '20년 만의 해후, 여성농악단'을 열었고 2004년에는 예술의 전당과 호암아트홀에서 ‘춤추는 바람꽃 여성농악’ 공연으로 여성농악단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세간에 알렸다.
이후 2011년, 제주도 장기 공연을 마치고 상경한 김운태 씨는 2012년 여수엑스포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을 모아 일산에서 공연준비에 한창이었다. 여성농악단이란 이름으로 출연하려 했으나 엑스포 측에서 최첨단 시대에 이름이 걸맞지 않다며 단체 이름을 새로 만들어 등록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엑스포 공연을 주선했던 진옥섭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은 자신이 연출했던 ‘팔무전’ ‘팔일’ 공연이 모두 성공했다며 조선시대 거리축제였던 '산대'란 이름과 ‘두루 아우르다’ ‘팔방미인’ ‘사통팔달’의 팔(八)을 합해서 ‘연희단 팔산대’란 이름을 지었다.
‘연희단팔산대’는 ‘호남여성농악단’을 설립한 김운태 단장의 부친 김칠선 씨가 만든 단체여서 자연스럽게 호남여성농악단의 소리와 춤·기악·풍물 등 여성농악의 맥을 이었다. 이렇게 ‘농악 걸 그룹’으로 새롭게 탄생한 팔산대의 주축은 20~30대 젊은 여성 단원들이다.
장보미(상쇠), 서은숙(장구) 등 단원들은 대부분은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국악·무용·인문학을 전공한 재원(才媛)들이다. 스승의 것을 배우고 그대로 따라하는 도제식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장단과 가락을 찾기 위해 스스로 험한 길을 택했다. 이들은 비록 지금은 비개비이지만 개비를 꿈꾸고 노름마치가 되길 원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도심의 연습장에서는 이웃에 피해를 주지않기위해 악기에 에어캡을 씌우고 밤새워 두드리기도 했다.
개비(甲)란 선대로부터 예능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을 일컫는다. 비개비(非甲)란 예능의 소질은 타고 났지만 말 그대로 ‘개비가 아니 사람을 지칭한다.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일가(一家)를 꿈꾼다. ‘노름마치’는 놀음과 마침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전문용어이다.
연희단팔산대 농악의 특징은 호남우도농악을 기본으로 ‘판굿’을 무대화한 것이다. 이들은 판굿을 벌리면서 처음부터 신명을 일으키기 위해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치지 않는다. 여유롭게 민요 가락부터 시작한다. 장단이 서서히 빨라지면서 흥을 돋우고 빠른 듯 느린 듯 가(歌)·무(舞)의 완급 조절이 이어지는 사이 공연은 어느새 절정에 다다른다. 이어 소고꾼들이 무대를 박차고 올라 공중제비를 돌고 5m 길이의 열두발상모를 자유자재로 돌리는 소녀단원의 신명나는 연기에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이어진다.
꽹과리와 소리로 농악을 지휘하는 상쇠 장보미(35) 씨는 “연희단팔산대는 기본은 고수하면서 전통 농악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해석해 선보이려 노력한다.”면서 “단순히 전통이니까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 보다는 농악이 좀더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친근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게 목표”라고 말했다.
-연희단팔산대 산파 김운태 단장-
“예술은 가슴과 창의력으로 하는 작업이다. 4차원 교육시대에 아직도 주입식 학교교육으로는 창의성 있는 인재를 키워내기 어렵다. 점차 학교운동장도 사라지면서 아이들은 몸을 쓸 줄 모르고 손 안에 핸드폰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 큰일이다.”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연희단팔산대는 예술가를 키우지 예술강사를 키우지 않아요!”
“우리 단원들은 끊임없이 연습하고 공연을 통해서 스스로 깨우쳐나갑니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내 생각에 부족한 점, 장점 등만 알려주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저는 그들이 가는 길에 파트너이고 조력자일 뿐입니다. 내 것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건 예술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로강습도 하지 않습니다.”
연희단팔산대 김운태 단장의 제자 교육 방침과 운영방침은 명료했다. 더디지만 부단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춤과 소리와 연기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계보가 없으면 인정을 안 해주는 풍습이 학계에 있다. 인간문화재인 스승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으면 전수자도 이수자도 안된다. 사물놀이의 명인 김덕수, 이광수 선생도 인간문화재가 못됐다.”면서 안타까운 현실도 토로했다.
김운태는 한 시절 전국을 들썩였던 여성예인단체 '호남여성농악단'을 운영했던 김칠선 단장의 아들로 유랑의 채취가 남은 몇 안 되는 노름마치 춤꾼이자 전통공연 연출가이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공중제비를 돌았다. 농악단의 스승 백남윤에게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익힌 춤사위와 웃다리 풍물의 빠른 기량을 타고난 재주로 소화해낸 그의 ‘채상소고춤’은 독보적이다. 채상소고춤은 농악대의 소고잽이가 상모로 원을 그리며 추는 춤으로 관객들에게는 아름다우면서도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 춤이다.
1963년 전라북도 완주 출생의 김운태는 전국대사습대회 농악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김덕수·이광수 등과 함께 1980~1990년대 사물놀이 붐을 일으킨 원년 멤버로 활동했다. 1990년 유럽 8개국 순회공연 등 다수의 해외 공연에도 참여해 우리나라의 춤사위를 선보이며 각광을 받았다.
그는 외국에서처럼 공연을 보면서 음식과 술,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신개념 극장 사업을 시작해 크게 성공하는 듯 했으나 국내 제도와 법규의 제약을 받아 수십억 손실을 안는 채 끝내 옥고까지 치뤘다. 다행히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후 김 단장은 다시 힘겹게 모은 돈 5억 원을 종자돈으로 강남에 전통문화 공연장을 만들어 재도전했으나 젊은이들의 무관심으로 또다시 실패를 겪었다. 실의에 빠진 김 단장은 한때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그를 잊지 않고 찾아온 후배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상모를 쓰고 소고를 손에 잡았다.
김 단장은 전통공연을 배우고 싶어 하는 후배들과 뜻을 같이해 2007년 제주도로 내려가 불모지 제주에 농악바람을 일으켰다. 2011년에는 3명의 제자와 함께 경기도 일산에 똬리를 튼 후 연희단팔산대를 만들었다.
그는 오늘도 부친 김칠선이 호남여성농악단을 이끌었던 것처럼 30여 년간 멈추었던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으면서 여성농악에 혼을 불어 넣고 있다.
-연희단팔산대가 한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연희단팔산대는 2012년 여수엑스포 전통마당에서 5월에서 8월까지 하루 평균 4회, 총 400회 출연하며 주최 측의 예상을 깨고 엑스포 최고의 공연으로 열풍을 일으켰다. 여세를 몰아 10월, 영국으로 날아가 2012년 하계패러림픽 기념 런던 템즈페스티벌 공연에 참여해 박수갈채를 받았고 12월에는 동경 초월극장에서 열린 <무천>에서 판굿으로 일본 전통 예술가들을 놀라게 했다.
2013년에는 말레이시아 레인 포레스트 월드뮤직페스티벌에 참여했고 2014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무풍’공연과 2015년 정초 무풍 앵콜 공연 역시 전좌석 매진을 기록했다. 같은 해 농악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면서 팔산대의 무풍공연이 영상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해외공연은 가는 곳 마다 큰 관심을 받았다. 스페인, 터키, 프랑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2016년 발레와 함께한 콜라보레이션 농악과 발레의 만남 ‘아리랑공연’에서는 발레보다 우아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짧은 시간 내에 여성농악을 국내외에 크게 알린 연희단팔산대는 지금 변신 중이다.
2018년 문체부에서 인가를 받아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지난해 김운태 단장이 대표 자리를 내려놓고 지금은 최연장 단원인 서은숙(37)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협동조합은 여성예술가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일들을 도모하려한다. 여성들을 위한 예술인 마을을 만들어 재능교류 및 기부, 결혼 여성들의 가장 큰 문제인 육아, 교육 문제도 해결해 보려고 한다. 또한 서양 음악을 배우기 위해 많은 인재들이 이태리, 프랑스 등 외국을 찾아 나가듯이 우리의 전통 음악을 배우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전통음악학교도 만들려고 계획 중이다.
연희단팔산대는 제도권의 정해진 커리큘럼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지금도 그녀들의 실력을 인정하는 상위 단체에서는 함께 일하자고 손짓하지만 그녀들은 거친 들판에서 타협하지 않고 우리의 전통 풍물을 지키고 키워나가고 있다.
“일본 마츠리(일본축제)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우리의 길놀이 퍼레이드는 보면 놀랄 겁니다. 마츠리를 접수하고 스코틀랜드의 세계적 여름축제인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에서 세계인을 깜작 놀라게 하는게 우리의 목표입니다.”이희원(25) 단원이 자신감 있게 말한다.
단원들은 3년 전 정선군에서 폐교를 수리해 마련해준 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에서 오전에는 실내에서 이론 교육과 소리공부를 하고 자신들이 공연 때 쓸 상모와 공연도구도 직접 만든다. 오후에는 정선종합운동장에서 공연 연습을 하고 편을 나누어 축구를 한다. 축구가 체력을 단련시키고 협동심과 유연성, 순발력, 판단력을 키우는데 최고라는 게 김운태 단장의 지론이다. 호남여성농악단 시절부터 단원이었던 김정숙(65·징춤)과 이영단(63·설장구) 원로단원과 10여명의 객원단원을 뺀 나머지 단원들은 모두 수년간 함께 먹고 자며 밤낮으로 연습해 눈빛만 봐도 장단이 척척 맞는다.
여름이 막 시작되던 지난 6월 초, 단원들은 정선종합운동장에서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모처럼 오일장에 들렸다. 그들은 정선장이 서는 날에는 줄곧 이곳에서 공연을 해왔다. 단원들은 시장에서 장을 본 후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미니버스에 올라 숙소인 광하분교(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로 향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동네라 저녁 해도 일찍 감치 산 능선에 걸렸다. 1960년대 여성농악단 단원들이 타고 다녔던 트럭만큼이나 낡은 차량이지만 우리 전통예술을 발전시켜나가려는 젊은 예인들의 당당함과 밝은 웃음이 차창 밖으로 넘치며 미니버스는 고갯길을 힘차게 넘고 있었다.
연희단팔산대는 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을 떠나 지난 10일, 경기도 양평에 새 보금자리를 얻어 안착 중이다.
정선=글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사진=곽경근대기자·왕고섶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