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는 일본 아베정권의 경제침략과 군국주의 부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전격 종료된 시점에서 일본 침탈의 뼈아픈 역사 현장을 돌아보았다.
지난 3,1절을 맞아 연재한 ‘역사 교훈 여행’ 다크투어(dark tour) 시리즈 “적산가옥” 이어 43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에게 7년 전쟁의 고통을 안겨준 임진왜란 당시 축조한 한국 내 일본성인 왜성(倭城)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1. 일본성의 원조 ‘왜성’이란
2. 왜성의 원형이 잘 보존된 서생포 왜성과 울산 왜성
3.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지 순천왜성
4. 눈뜨고도 코 베인 사천왜성 외 남해안의 주요 왜성
4. ‘눈뜨고도 코 베인’ 사천왜성(선진리성) 외 남해안의 주요 왜성
-해전에서는 대승, 육전에선 대패-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첫 등장한 사천해전-
-왜군에 참패하면서 백성들까지 코와 귀 잘려나가-
-치욕스럽지만 보존해서 교훈 삼아야-
-봄이면 온갖 쓰라림 감추고 화려한 벚꽃 피어내-
-눈 뜨고도 코 베인 아픈 역사현장-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 무덤(코 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교토국립박물관 북쪽에 있는 도요쿠니 신사 앞에 있는 ‘귀 (코)무덤’의 안내문이다.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너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으로 바꾸어 부른다. 본인들이 생각해도 섬뜩한 짓을 한 것이 일본이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말은 “세상이 험하니 조심해라”는 정도의 금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코 베어간다”는 말에는 참혹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모든 조선인을 죽이고 조선을 텅 비게 만들라” 명령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전리품으로 귀를 잘라 오라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두 개의 귀를 두 사람으로 계산해 전공을 쌓는다는 걸 안 도요토미는 정유재란 시에는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 코의 개수만큼 군사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포상을 내리도록 지시한 것이다. 일본은 코를 증명하는 코 영수증도 발행했다.
왜군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민간인의 코도 서슴없이 잘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카와우치 히데모토의 <조선물어‧朝鮮物語>에는 “조선 사람 머리 18만538개, 명나라 사람 머리 2만9014개 등 21만4752개가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군에서는 머릿수 879명의 조선인 코를 베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남원지역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에 “왜적은 사람을 보면 죽이든 안 죽이든 무조건 코를 베어 갔다. 전쟁이 끝난 뒤 거리에서 코 없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썼다.
사천왜성을 돌아보며 430여 년 전 이 땅에서 저지른 왜군들의 잔인한 행위에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사천 선진리성(泗川 船津里城‧사천왜성)은
사천 선진리성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위치한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이다. 일제강점기 때 1936년 5월에는 고적 제81호로 지정됐으나 다른 왜성들과 마찬가지로 왜성이란 이유로 국가 사적에서 1998년 9월 8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격하되었다.
원래 선진리성은 고려 시대 초기 남도수군의 조창(漕倉:고려·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징수한 곡물을 보관하던 곳) 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어 이 지역에서는 통양포 또는 통조포로 불렸으며 조창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가 출몰하자 조세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으며 통양창의 역할 또한 축소되었다.
선진항(船津港)의 북쪽에 위치한 선진리 왜성은 서·남·북 3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동쪽만 육지에 접하고 있는 지형이다. 고지의 정상에 동서 약 18m, 남북 약 20m의 아성(牙城)을 두고, 그 남쪽으로 동서 약 18m, 남북 약 40m의 장방형 딸림성곽(副郭)을 한층 낮게 연결하였다. 주성곽은 딸림성곽의 끝에서부터 지형에 따라 한층 낮은 외성(外城)이 날개처럼 동쪽으로 벌어져 있다.
아성의 북단에는 동서 약 10m, 남북 약 15m, 높이 4m의 천수각(天守閣)이라는 장대(將臺)를 높다랗게 쌓아올렸다. 석축의 성벽이 완성된 곳은 이 장대뿐이고, 딸림성곽의 서반부는 1∼2m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동반부는 일부 초석만 남아 있어 겨우 그 규모를 추측할 수 있는 정도이며, 그 밖의 대부분은 토성으로 축조된 것이다.
이 지역은 원래 암석이 귀한 곳이어서 축성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 토석혼용의 성곽을 급조한 것으로 보인다. 토성으로 된 외성은 완전히 허물어져 그 면모를 알아보기 어렵다. 남쪽의 것은 석축, 서쪽의 것은 토축인데, 성 아래 선창으로 통하는 성문터로 추측된다. 외곽에는 참호(塹壕)와 목책(木柵)을 이중구조로 성의 북쪽에도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명나라 및 일본의 문헌에 모두 ‘사천신책(泗川新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봐도 이 성이 완성된 성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박종익(58) 소장은 “왜성은 일본 성곽 발달사에 있어서 그 축성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거의 보수되지 않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일본성곽의 단절부분이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서 “아직도 우리나라는 왜성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훼손하고 방치하기보다는 지속적인 관리 보존을 통해 교육과 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사천성 앞 바다에 등장한 거북선
사천 선진리성을 둘러싼 바다는 1592년 5월 29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일본 수군을 섬멸한 사천해전(泗川洋海戰)으로 유명하다.
사천 해전(泗川海戰)은 1592년 음력 5월 29일에 사천에서 왜수군 13척을 전멸시킨 해전으로, 이순신은 여기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다.
전투로는 1592년(선조 25년) 5월 7일부터 8일까지 치른 세 번의 해전에 이어 네 번째이다. 같은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치러졌다. 함대 규모는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 좌수영의 정예 함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 우수영의 함대 3척 등 총 26척이다.
이순신 함대에는 새로 창안된 전함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사천해전이 처음이다.
당시 해전에서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거북선은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총통과 각종 함포로 무장해 적선 격침은 물론,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거북선은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상징하는 전선으로 위용을 떨쳤다. 사천해전에서 왜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사천 해전은 이순신이 치른 다른 해전과 마찬가지로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해 그 성능을 확인하였다.
사천왜성은 1974년에서 1975년 보수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선진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李忠武公泗川海戰勝捷紀念碑)’도 세웠다. 승첩기념비 아래 거북선을 함께 건립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바다에서는 대승, 육지에서는 대패
임진왜란 당시 사천 지역에서는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사천해전과 또 하나는 선조 31년(1598년) 조명연합군이 왜군에게 대패한 사천왜성 전투이다. 1598년 10월, 명나라의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연합군이 선진리왜성에 집결한 왜군을 공격하였다. 명의 유격장 팽신고(彭信古)가 거느린 군사가 화포 사격을 집중하면서 동문으로 접근하였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막혀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그런 가운데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조명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틈을 타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하였고,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진주 방면으로 후퇴하면서 남강을 건널 때에는 많은 군사가 강에 빠져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8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들어 아마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수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달아나는 조·명 연합군을 진주까지 쫓아갔던 왜군들은 민간인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왜군은 그들의 승리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죽은 군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냈다.
왜군은 조·명 연합군 전사자들의 주검을 사천왜성 앞에 파묻었는데 악취가 심하자 700m가량 떨어진 곳에 옮겨 파묻었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36m²의 사각형으로 명나라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당병무덤’또는 목 잘린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댕강무데기’라고도 불렀다.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타국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위령제가 지내진다.
또한 임진왜란에 참여해 큰 공을 세운 왜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아들 시마즈 타다쓰네(島津忠恒),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등 왜장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18년 성을 매수 또는 기부 받아 공원으로 정비하고 조상을 기리는 석비를 세웠다. 해방 후 석비는 마을 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시마즈 가문이 세웠던 비석 터에는 한국전쟁 중 순국한 공군장병 위령비인 ‘충령비’가 세워져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고 있다.
배시남 사천시문화관광해설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은 우리나라에 너무나 큰 피해를 입혀왔다.”면서 “그러나 그들은 자국의 잘못에 대해 반성이나 사과도 없다. 우리도 힘을 키우고 철저히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왜성의 거울삼아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고 현명한 답을 찾아야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다시 한 번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에 내 던져졌다.
그 외 현존하는 남해안 주요 왜성들
웅천왜성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다.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골왜성
임진왜란 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축성을 지휘하였으며,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씩 교대로 수비를 담당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
성의 둘레는 594m,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며 성내의 전체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성곽이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혼마루를 이루고, 비탈을 깎아내면서 니노마루, 산노마루로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노보리이시가키)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이 성곽의 축조에는 5만 명가량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등포왜성
영등포왜성은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 6-17번지 구영마을 뒷산에 있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자가 축성하였다. 거제도 북부에 배치된 장문포왜성, 송진포왜성 등과 함께 3개의 왜성 중 가장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바다 건너에는 웅천왜성, 안골포왜성, 명동왜성 등이 위치하고 있다.
영등포왜성은 거제도의 북단에 위치하는 대봉산(해발 257.7m)의 정상부에서 약간 북측으로 내려오는 능선 일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거제도에 위치하는 왜성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해왜성(선소왜성)
선소왜성(船所倭城), 이칭 남해왜성(南海倭城)은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63-1에 윤산 천남대라는 언덕에 축조된 정유재란 때 일본군(日本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와카사카 야스히로가 축성하고 대마도주 쇼 오시토시가 1,000여 명의 대군을 주둔 시킨 곳이다.
1597년 11월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板安治)와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축성을 담당했다. 이후 소 요시토시가 수비장이 되어 1000여 명 병력으로 주둔했다. 오늘날 남해왜성은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천수대와 내성은 남아 있는 석축으로 그 형태를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외성은 도로와 주택으로 인해 불가능하다.
죽도왜성
죽도왜성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의 김해평야에 있는 성으로 1593년 건립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았으며 '죽도성(竹島城)'이라고도 한다.
현재 김해죽도왜성의 중심부 대부분은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일부 밭으로 개간되고 있다.
죽도는 김해 육지로부터 공격하는 조선군(朝鮮軍)을 막거나 공격하고, 선박을 정박시켜 후퇴에 용이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나베시마가 쌓은 것으로, 해발 35m의 낮은 구릉지 양쪽에 축조되었다.
구포왜성
구포왜성은 김해 죽도왜성의 지성으로 1593년 일본장수 고바야가와가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쌓은 왜성으로 낙동강변을 끼고 그 아래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 일본군 나베시마의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방어했는데 부산지역에 있는 11개의 왜성 가운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편에 속한다. 성 상단부의 석축지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왜성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성벽은 나사모양으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좁히면서 올려 쌓았다.
기장죽성리왜성
부산광역시 기장의 죽성리 마을 해안 가까이에 있는 구릉을 이용하여,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쌓은 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약 960m, 성벽높이는 약 4m이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가까운 구릉을 택하여 수송·통신 등에 자유롭고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쌓는다. 이 성은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또한 울산의 서생포왜성·울산왜성·부산일본성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성곽이 남아 있지만 주위는 밭과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자성대왜성(부산진지성)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가칭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은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든 부산진성의 지성(支城)이다. 넓이는 24,198m²이고,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부산진성의 외성(外城)이었던 것을 왜군(倭軍)이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일본식으로 새로 쌓은 성이다. <위 ‘그 외 주요 왜성’ 기사는 위키백과에서 발췌했음>
7년 왜란에 치를 떨었던 선조도 전쟁이 끝난 후 우리의 성을 신축하거나 개축하면서 난공불락이었던 왜성의 장단점을 파악해 수축(修築)하라고 지시한다.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인 나동욱(57) 박사는 “임란이후 축성된 함경북도 경성군에 위치한 경성읍성(鏡城邑城)이나 수원 화성(華城), 안성 죽주산성(竹州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 등에서의 일본식(日本式) 성벽의 축성사례(築城事例)를 잘 살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강화읍성이나 상당산성, 동래읍성, 통영성지 등 근세 산성의 최근 발굴조사에서도 성벽의 축조수법이 왜성의 축조수법을 닮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 왜성의 영향으로 조선성곽의 축조수법에 있어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면서 “동시에 일본성에서도 우리 성의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일본 학자들도 한국의 성과 왜성에 대한 관심이 높은 만큼 아픈 역사는 잊지말아야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교류와 합동연구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천=글‧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사진=곽경근 대기자 ‧왕고섶 사진가‧ 부산박물관 제공